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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story

[스크랩] 타이타닉 호와 구세군의 관계

by 초코우유 ∽ blog 2013. 2. 20.
(한영 대조판) 타이타닉 호와 구세군의 관계 "한번 더 전 국가적인 슬픔이 그 희생적이고도 숭고한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깊이 애도하며, 그 사건을 되새겼고,,,,,, 이렇게 유례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적이 없었다.." <영국 구세공보 1912년 4월 27일 기사 내용> 영국 왕세자비 Diana의 죽음이후 사용되지 않았을 법한 이런 글이, 88년전 Titanic호(정식명칭 RMS Titnic)의 침몰로 수많은 사람들을 잃은 영국인들이 슬픔에 잠겼을 때 쓰여진 것이다. 1912년 4월 27일자 영국 구세공보는, 당시 구세군 악대원, 찬양대원, 하사관(구세군 교회 평신도직분자)들이 전국민이 느꼈던 깊은 충격에 동참하고자 바로 한 주간 전 즉 배가 침몰한지 6일이 지난 4월 21일 일요일, 나라 곳곳에서 행해진 여러 추도식과 추모행렬에 참여한 내용을,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전했다. Regent Hall 영문 Band는 Titanic호의 소유주인 White Star 회사의 매니저로 부터 요청을 받아 회사 사무실앞에서 "Rock of Ages" 연주하기 위해 트라팔가 광장으로 갔었고, Derby 2 영문의 장년악대와 청소년 악대는 찬양대와 함께 마켓플레이스에서 옥외 추모연주를 했다. 구세군악대와 찬양대가 구세군 회관까지 추모행진을 할 때에는 거대한 인파가 거리에 줄지어 서있었는데, 그 수가 20,000여명으로 집계되었었다. 장송곡 "Saul"이 연주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흐느껴 우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 장송곡은 클랩톤 지역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사회사업기관에 소속된 사관학생들과 Congress Hall 영문의 교인들이 거리를 행진할 때 눈물로 얼룩진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버밍함에서는 Citadel 영문 Band가 행진하는 길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추도집회 인도는 구세군 부관(당시 직책의 하나) Tom Blower가 했다. "가장 인상깊은 내용"으로 기자는 그의 설교 중 "희생자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라고 썼다. 기사 속에 등장한 행진에 참여했던 수 천명의 악대원들 중 아무도 Lye에서 온 사람들 만큼 발병나지 는 않았을 것이다. 공보에 의하면 "악대는 10시에 모여서 구호 기금을 돕기 위해 거리 여기저기에서 2시간 동안 연주했고..... 오후에도 악대는 다시 같은 목적으로 거리를 행진했다. 만약 그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밤에 엄숙한 옥외집회를 연후 영문까지 서서히 행진했다"고 설명했다. Titanic호의 승객들 중 몇 명은 구세군과 관련이 있었다. Bristol 제1영문의 구세공보 통신원은 3주전까지 부인과 함께 영문에 정규 참석했던 한 남자가, 일을 찾기 위해 Bristol을 떠났다가, Titanic호와 함께 침몰했다고 전했다. 그는 가장을 잃고 슬퍼하는 부인과 두 아들을 남겨놓았다. 이런 규모의 재난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긴 하지만,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에 관해서 처음에 혼란이 있었다. 이를테면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간행물은 Folkstone 영문 악대원 Ramell의 딸인 Mrs Nye 자매가 희생자에 포함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을 때, 미국 사령관 Evangeline Booth(나중에 구세군 최초 여성 대장 )가 생존자들을 후송해 놓았던 뉴욕부두에서 그들을 돌보면서 보낸 전보에는 "Mrs Nye가 생존해 있다"는 기쁜 소식을 담고 있었다. 사령관 에반젤린 부스는 군복을 입은 구세군인 Mrs Abbott는 13살, 16살을 갓 넘긴 그녀의 두 아들이 그녀의 눈 앞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며 뗏목 위에서 표류하다 5시간이 지난 이후 구조되었다고 전하며, 그녀는 "확신하건데 그녀의 아들들은 진정한 구세군인들 처럼 죽었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미국사령관이 보낸 전보 및 기타 구세군의 구호활동에 대한 자료는 "세계의 정기여객선"을 연구 조사하는 그룹인 "Titanic International"이 발행하는 잡지 "Voyage"의 1991년도 6월판에 실려있다. 이 잡지는 Titanic호에 과거 구세군인이었던 사람 있었다고 전했다. Robert J. Bateman목사로 알려진 그는, Bristol Fishponds 영문의 구세공보 통신원에 따르면, 그 지역에서 구세군을 개척했었던 인물이라고 전하고 있다. Titanic호가 Southampton을 출항한 날 83회 생일축하를 받은 William Booth대장은, 미국 대통령 William Taft에게 즉각 위로 전문을 보냈다. "내 마음은 Titanic호를 잃음으로서 세상에 들이닥친 재앙으로 두려움에 차 있습니다. 내 마음은 희생자들의 죽음으로, 내 오랜 믿을만한 친구의 죽음과 같이 슬픔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마음은 잃은 것을 결코 되찾을 수 없는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갑작스러우면서도 엄숙하게 소환된다는 이 깊은 근본적 영적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고 그는 썼다. (창립자 그 또한 단지 4달 후에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하여 대중들이, 내세의 실재와 가까움을 그리고 이를 맞이할 긴급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준비가 필요함을 알게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고 위로하시길!" 위에서 언급한 창립자의 오랜 믿을 만한 친구들 중의 한사람은 의심할 필요 없이 The Pall Mall Gazette의 편집장이며 구세군의 훌륭한 후원자인 W. T. Stead 말한다. 그는 구세군과 함께 13세에서 16세로 연령을 올리는 법률개정운동을 하면서 투옥되기도 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the age of consent라는 법은 영국 내에서 여자가 성교를 승락하는 법적 나이를 정하는 것으로서, 당시 매춘연령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번역자 주) 영국 구세군인들은 오늘날의 25만파운드 보다 가치가 나가는 1,150 파운드 9실링 4 디네어리(펜스)를 "Titanic호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재난기금"으로 모았다. 최초의 천 파운드 수표에 관하여 참모총장Bramwell Booth는 기록하기를, "우리의 친애하는 시민들이 아주 궁핍한 중에서 이 돈을 기부했습니다. 허지만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내가 믿기로, 동전 한 닢마다 고통받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을 위한 기도와 믿음과 애정어린 관심이 동반되었다는 것입니다." 모금액 중에서 가장 큰 금액은 Southampton에서 나왔다. Voyage 잡지에 따르면, 이 도시는 재난의 피해를 받은 수로 보면 가장 영향이 컸다고 한다. 타이타닉호 많은 승무원들이 이 도시 출신이었는데, 현지 구세군 "노동자의 집"을 관리하는 Haynes사관에 의하면, 최근 끝난 석탄 파업으로 그동안 항해를 나가지 못해 육지에 묶여 있으며 어려움을 겪었던 선원들은 특히, Titanic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빈민지역담당 사관 Ensign Palmer는, "20일 토요일. 나는 3시간 30분 동안 구호기금을 모금했는데,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길 원하질 않는다. 수 천명이 우리와 함께 울었었다. 우리는 30파운드 10실링을 모았는데 그 중 20 파운드는 동전으로, 그리고 정말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 한 사람들이 수 백 개의 반페니 동전(1페니의 반)을 헌금했다."고 기록했다. Titanic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집회와 행진 기록들 중에는 거의 전반적으로 일관된 것이 있는데, , 그것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란 찬송이 연주되고 불러졌다는 것이다. 국제본영 참모 찬양대가 Portslade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그들의 레파토리에 그 찬송을 추가됐다.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지의 기록에 의하면 곳곳에서 선원들의 요청에 의해서 추모집회가 열릴 때마다 이 찬송이 불려졌다고 한다. 이 곡은 특별히 재난과 관계가 있었다. 그 이유는 타이타닉호 안의 오케스트라, 실제로는 7인조 재즈 밴드가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지의 표현처럼, "대서양이 거선(巨船)을 삼키는 동안 이 곡을 연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세군 모든 병사들 그리고 특별히 구세군의 음악가들에게" 편집자는 언급하길 "불운한 배에 타고 있던 밴드가 연주한 것으로 보이는 숭고한 영웅적 행위이상으로 타이타닉 참극을 말해줄 이야기 소재는 없을 것이다...... 자! 언론이 그런 용감한 악대원 이름의 명예를 세워주길! 악대의 리더 Mr [Wallace] Hartley가 감리교인 이었는데, 그의 깊은 종교적 육감이 이 찬송을 즉흥적으로 소개하여 연주함으로 그 대중적 생명을 연장시킨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신문은 Mr Hartley의 간략한 전기를 소개하며, 그는 직업과 관련하여 "재즈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인텔리인 척하는 허식"이 전혀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역사가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이 악대가 연주한 찬송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훗날 참극의 실상과 허구가 서로 뒤섞이게 되면서, 생존자들조차도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Elizabeth Nye는 뉴욕 부두에 구조선 Carpathia로부터 발을 내디뎠을 때, Evangeline Booth는 많은 생존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포옹하고 환영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구세공보 리포터에게 Titanic호의 마지막 순간을 설명했다. "보통 배가 항해할 때처럼 옆으로 평탄하게 뒤집힌 것이 아니라 끝이 들려 올라 같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배가 물 속에 경사지게 반쯤 가라앉게 되었을 때 완전히 두 동강이 나면서 불이 꺼졌고.....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굉장했다. 구명보트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입고 있질 못했기에 추위에 노출되어 고생했다. 우리는 약 5시간 30분 동안 표류했다. 물이 몹시 차가 왔지만, 아주 맑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바다는 정말 잔잔했다." Elizabeth의 이야기는 끝까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명성을 가진 Titanic의 최후를 보여준다. 그 배가 충돌되었을 때, 승객 중 한 명이 Elizabeth의 두려움을 쫓아버리기 위해,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세기적 유행어의 하나가 된 "그저 빙산일 뿐이야"이다 Elizabeth의 이야기와 같이, 승객들 개개인이 보여준 용감과 희생을 제외하고는 Titanic 재난 사건을 통해 밝은 대목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미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New York에 도착했을 때 미국 사령관 E. Booth와 미국 구세군 참모악대장으로 임명된 George Darby 사관(정위)이 그녀를 환영했었다. Voyage 지에 따르면, 그녀가 기절한 후 눈을 뜨고 부두가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젊은 여성이 보았던 첫 번째 사람의 얼굴이 바로 "Darby 사관"이었다고 한다. 그 사관은 분명히 Elizabeth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그 다음해 Mrs George Darby (Darvy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벌번역 (우숙자) Titanic 과 구세군의 관계(1) "ONCE more a national sorrow has become a sacrificial and uplifting thing. The hearts of men and women have been deeply touched, consciences have been awakened . . . an impression was made on the multitudes to an extent never before exceeded." The War Cry - 27 April 1912 These words - which would not have been out of place after the death of Diana, Princess of Wales - were written 88 years ago as the British nation grieved for the people lost with the liner RMS Titanic.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 (forerunner of "Salvationist") of 27 April 1912 demonstrated the depth of shock felt by the whole country when it devoted a page to reports of various memorial services and marches which had taken place around the country the previous Sunday - 21 April, six days after the ship went down. Regent Hall Band went to Trafalgar Square to play outside the offices of White Star Co - Titanic"s owners - where the manager of the offices sent out a request for the band to play "Rock of Ages". Derby 2 Senior and Junior Bands joined their songsters for an open-air meeting in the market place. On the march back "mammoth crowds lined the route to the citadel, computed at 20,000. Many were noticed weeping bitterly at the solemn strain of the Dead March in "Saul"." That tune had a similar effect at Clapton, where "many a tear-dimmed eye was seen" as cadets from the social institution and members of Congress Hall Corps marched through the streets. In Birmingham the Citadel Band"s march route was "lined with thousands of people". The memorial service at the hall was led by Adjutant Tom Blower. "Best of all," wrote the reporter, remembering his priorities, "many souls sought pardon." Of the thousands of marching bandsmen mentioned in reports, none could have been quite as footsore as those from Lye. The paper reported: "The band met at 10 o"clock and for two hours played up and down the streets in aid of the Relief Fund . . . The band again paraded the streets in the afternoon for the same purpose." And if that were not enough: "At night a solemn open-air preceded a slow march to the hall"! Some of Titanic"s passengers had Army links. The correspondent from Bristol 1 Corps wrote, "A man who until three weeks ago was, with his wife, a regular attender at the Citadel, and left Bristol in search of work, went down with the Titanic, and has left a sorrowing wife and two boys to mourn his loss." As tends to happen with a disaster on such a scale, there was initial confusion as to who had died and who had survived. For instance,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 reported that "Sister Mrs Nye, daughter of Bandsman Ramell, of Folkestone, was among the victims" while a message issued by Commander Evangeline Booth - later the Army"s first woman General - who ministered to survivors at the dock in New York to which they were brought, bore the happy news that "Mrs Nye . . . is safe"! Commander Booth also reported that "Mrs Abbott, a Salvationist in uniform, was rescued after five hours drifting on a raft, during which time her two sons, aged sixteen-and-a-half and thirteen-and-a-half, drowned before her eyes." The commander added, "They died, I am assured, like true Salvationists." Commander Booth"s message, together with other information about the Army"s relief efforts, appeared in the June 1991 edition of "Voyage", the magazine of Titanic International, a group which researches "the liners of the world". The magazine notes that there may have been a former Salvationist on Titanic - the Rev Robert J. Bateman who, according to Bristol Fishponds Corps" War Cry correspondent, "was said to have commenced the Army work in this district". General William Booth, who celebrated his 83rd birthday the day Titanic sailed from Southampton, responded to the disaster in a cable to President William Taft of the United States. "My heart is moved," he wrote, "by the fearful calamity which has befallen the world in the loss of the Titanic - moved with sorrow for the dead, among whom are some of my long-tried friends; moved with sympathy for the living, whose loss can never be repaired, and moved in its deepest sources of feeling concerning that sudden and awful summons into the presence of God." (The Founder wasn"t to know then that he too would receive his Home call just four months later.) "I pray that it may speak to the multitudes of the reality and nearness of the world to come, and the urgency and overwhelming necessity of preparing for it. God bless and comfort you all!" One of the "long-tried" friends to whom the Founder referred was undoubtedly W. T. Stead, Editor of The Pall Mall Gazette and a great supporter of the Army. He had actively campaigned with the Army in its fight to raise the age of consent from13 to 16, during which he was briefly imprisoned for his efforts. British Salvationists raised £1,150 9s 4d for the Titanic Disaster Widows and Orphans Distress Fund - equivalent to more than £250,000 today. Along with a cheque for the first £1,000, Chief of the Staff Bramwell Booth wrote: "Our dear people have given this money out of their deep poverty, but what has touched me most about it is that I believe every shilling has been accompanied by prayer and faith and tender solicitude on behalf of those who have suffered." The largest sum of money came from Southampton - the city which, according to Voyage, "took the disaster"s brunt in terms of numbers affected". Many of the ship"s crew came from the city and according to Captain Haynes, who ran the Army"s working men"s home there, many had "regarded the Titanic as a godsend", particularly after the hardship caused by the recently finished coal strike during which many sailors were kept ashore. Slum officer Ensign Palmer wrote: "On Saturday, the 20th, I spent three-and-a-half hours collecting for the Relief Fund, and never want to live again through such an experience. Thousands wept with us. We collected £30 10s; £20 of it in copper, and many hundreds of halfpennies were given by the poorest of the poor." Throughout the reports of memorial services and marches for victims of Titanic there is one almost universal constant - the playing and singing of "Nearer, My God, to Thee". Even the International Staff Songsters added the song to their repertoire when they led meetings at Portslade.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 reported that it was sung during a memorial meeting "at the request of a number of rough sailor men". The song was particularly associated with the disaster because it was thought to have been played by the ship"s "orchestra" - actually a seven-piece jazz band - while, in the words of "The Bandsman, Songster, and Local Officer", "the ocean swallowed the leviathan". "To salvation soldiers generally, and to Army musicians in particular," wrote the Editor, "there has been nothing so touching in all the published narratives of the Titanic tragedy as the sublime heroism which appears to have been displayed by the bandsmen of the ill-fated vessel. . . Well may the public press do honour to the names of these brave bandsmen! It is a matter for satisfaction that the leader of the band, Mr [Wallace] Hartley, was himself a member of the Methodist Church, and it was probably his deep religious instincts that prompted the introduction of a song the popularity of which justly increases with the length of years." The paper carried a mini-biography of Mr Hartley, including the illuminating information that he had "none of the long-haired affectation often associated with the profession". Interestingly, some historians now believe that "Nearer, My God, to Thee" was not the hymn played by the band. But in the days following the tragedy fact became mixed with fiction in such a way that even the survivors could not be sure what really happened. When the aforementioned Elizabeth Nye stepped from the "rescue" ship Carpathia onto the dockside in New York she was greeted and hugged - as were many of the survivors - by Evangeline Booth. She then spoke to a War Cry reporter and described Titanic"s final moments. "She did not sink flatly, like boats sail the ocean, but tipped up," she said. "And when she was half submerged she broke completely in two and the lights went out . . . The cries for help were awful, many in the boats were insufficiently clad and suffering from exposure. We drifted about for five-and-a-half hours. It was a beautiful night, clear as could be [but] bitterly cold. The water was perfectly smooth." Elizabeth"s story shows that right to the end Titanic"s reputation for being unsinkable remained. When the boat was struck one of the passengers sought to dispel Elizabeth"s fears by reassuring her with what, with the benefit of hindsight, is one of the understatements of the century: "It"s just an iceberg." Apart from the bravery and devotion shown by many of the passengers it is difficult to find a bright spot in the Titanic disaster, unless you look at Elizabeth"s story. She was heading to America having been widowed but when she eventually reached New York she was greeted by Commander Booth and a Captain George Darby, the recently appointed national bandmaster. According to Voyage, "Captain Darby"s face was the first the young woman saw when she opened her eyes after a swoon and found herself beside the pier." The captain obviously made quite an impact on Elizabeth, because she entered training and the following year became Mrs Captain George Darby.
출처 : 대구칠곡 구세군교회
글쓴이 : 표희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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