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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story

청교도 신앙-청교도들은 누구이며 무엇이며 청교도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by 초코우유 ∽ blog 2014. 3. 3.

청교도 신앙

- 청교도들은 누구이며 무엇이며 청교도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



청교도 주의는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이다. '청교도'라는 말 자체는 경멸적으로 남용된 불확실한 말이었다. 1568년에 런던에는 재침례파 회중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스스로 청교도 혹은 흠 없는 주님의 어린양들이라고 불렀다. 청교도란 용어는 이들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청교도들의 강조점은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이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이처럼 철저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경건한 자들 혹은 명칭만의 교인이 아닌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또한 복음을 귀히 여기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성경의 경고처럼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 때문에 놀림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경건한 교인들에게는 '흥을 깨는 사람' 혹은 '청교도'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우리에게 청교도가 필요한 이유로 그들은 일상생활의 통합을 이루었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감정을 분발시켰다. 율법주의에 빠짐이 없이 율법 지향적이었고, 수치스러운 방종의 경향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타락한 인간 심령의 부정직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겸손과 자기 불신을 교화,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흠들과 숨어 있는 마음 속의 악들을 찾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자신을 검사하였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지금 당장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왜나하면 그러한 사랑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좋은 친구로 견실하게 사랑할 수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움으로 후에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었고, 배우자는 서로의 구원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로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자녀들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돌보며, 근실하고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인의 삶을 위해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청교도의 가정 생활 윤리는 질서와 예의와 가정 예배를 유지함이 기초가 되었다. 친절과 인내와 언행 일치와 격려의 태도는 가정에서 필수의 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가정에서의 어려움과 실망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어려움과 실망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풀이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성숙의 모범을 보였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그분과 맺는 관계를 따져서 평가하는 것이 청교도들의 습성이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영원 무궁히, 그리고 저 밑바닥으로부터 만족시키실 수 있다고 믿었다. 존 윈스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늘의 소망만이 진정한 위로와 안식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인한 위로가 아닌 다른 것을 더 즐거워함으로써 마음을 번민에 빠지지 않게 하기로 작정했다." 

사무엘 윌라드는 하나님이 "종교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한 후에,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바"라고 결론지었다.

청교도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은 영적, 도덕적 성결을 삶의 우선 과제로 삼는 것을 말한다. 백스터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결이 최고 덕목이요 추천 사항이다. 고귀한 것과 사특한 것 사이에는 확연한 구분이 지어져야 한다"고 썼다. 

청교도의 특징은 영적 우선 순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중대 사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중대 사안이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는 영혼, 사죄, 영생, 하나님을 친근히 함, 그리고 거룩한 생활이었다. 

청교도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통찰에 의해 선 사상이요 운동이다. 청교도들은 동시에 두 세계에 살았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지상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이다. 청교도들은 이 두 세계를 똑같이 실재(實在)로 취급했기 때문에,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 사이에는 어떤 틈바구니도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삶이 거룩했던 것이다. 

존 코튼은 이렇게 이론적으로 말한다. 

"영적인 삶은 물론이고 공민으로서 이 땅에서 사는 삶 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분은 그분을 믿는 믿음의 역사가 미치지 않아도 좋은 치외 법권 지역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토머스 구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열심을 영적으로 승화하여 이 땅에서조차 천상의 심령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교도는 삶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를 가지고 있다. 

청교도는 지상적인 일들을 신성하게 처리해 나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로 지상적인 일들을 멀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에 거룩함을 불어넣기도 했다. 삶에서 거룩함을 불어넣지 못할 만한 영역은 없다. 

삶의 전영역에 걸친 경건이 청교도들의 목표였다. 

종교 개혁자들처럼 청교도들도 성속 이분법을 거부했다. 청교도들은 모든 직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순종하며(봉사를 통하여), 이웃 사랑을 나타내는 장(長)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직업에 필연성을 불어넣었다. 

나다니엘 매더(Nathaniel Mather)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모든 활동이 영화(靈化)된다. 이를테면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은혜를 드러내는 활동이 되고, 먹고 마시는 일도 순종의 일이 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고귀한 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목표는 매일 하는 일을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헌신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토머스 게이테커(Thomas Gataker)는 성속이 서로 마찰하거나 충돌하지 않음을 이런 글로써 밝혔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세상 직업일랑 당장 벗어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일들과 더불어 소명을 붙들고, 다른 일들과 동시에 소명을 좇아야 한다." 

청교도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이 세상의 어떤 노동에 갇혀서만이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서이다. 존 코튼의 글에서도 같은 사상이 엿보인다.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자기 소명을 따라 산다. 영적 생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민적인 생활까지,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삶의 의무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코튼 매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에 종사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종사하느냐에 관해서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직업을 그리스도인답게 수행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윌리엄 퍼킨즈는 그의 고전적인 저작 사람의 소명 또는 부르심에 관한 논문(Treatise of the Vocations or Callings of Me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명 또는 부르심이란 일종의 생활 자세로서 공동선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 또는 부과하신 것이다...... 각계 각층,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준행해야 한다. 

소명 교리는 미국 청교도에서 조금 더 부각된다. 코튼 매더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소명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필생의 과업으로 알고...... 진력해야 할 각별한 사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존 코튼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믿음은 우리 마음을 확실한 소명을 따라 살도록 자극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이 은혜 베푸시는 방법을 바라보자마자, 확실한 소명과 직업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한다. 

청교도적 소명 개념이 끼친 영향 중의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가 되게 했다는 점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 주시는 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과 인격을 별개로 취급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일의 중요성은 일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일하는 사람이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를 겉으로 드러내는 수단이다. 어떤 청교도 문헌에는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든, 그 소명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 일을 맡기시는 분이라면, 그런 일은 그분에 대한 봉사일 수 있다. 존 코튼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하듯이 신실하게,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듯이 일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길과 일을 인정하실 것임을 알기에 마음 편히 일한다." 

청교도들이 보기에 받은 바 소명을 행한다 함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교리가 가져다 준 또 다른 현실적인 결과는 직업에 만족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소명에 충실해야 함을 굳게 믿었다. 천직이란 가볍게 결정할 것도, 쉽게 포기할 것도 아니었다. 청교도들의 소명관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이직(離職)하는 형태에 제한을 가한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정당한 경우에라도 직업을 옮기지 못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관행을 분명히 경계했다. 

청교도들의 소명관은 사람에게 임무를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의식의 구현으로서의 일, 자기 직무에 만족함, 그리고 자기 천직에 충실을 기함 등 여러 개념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존 코튼의 권면에 훌륭하게 녹아 들어 있다. "그대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당당하고 충성되게, 또한 천국 시민의 심정으로 그것을 행하라." 

청교도 이론에 의하면, 노동의 보상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회에 유익을 주는 일이었다. 리처드 스틸은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 틀림없이 그분은 당신 마음이 흡족하도록 상을 내리실 분이다." 그리고 그 상급이 도덕적이고 영적이라는 점은 청교도들의 언급을 통해서 깨끗하게 드러난다. 

윌리엄 퍼킨즈는 이렇게 주장했다.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명으로 받은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르심을 좇아 노동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의 한계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에게 봉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 있다." 

청교도들은 노동의 목적을 영적이고 도덕적인 데 둠과 아울러 다음과 같은 목표들이 직업 선택을 좌우하는 요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을 내렸다. 

리처드 백스터의 말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직업 또는 사명을 택하라.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거나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나 사명을 선택하지 말라. 가장 많이 선을 행할 수 있고 가장 덜 죄 짓는 쪽을 택하라." 

청교도 윤리에서 일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기에 달려 있었다. 그들의 노동관과 관련하여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중용을 이루는 일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 일면 게으름 또는 태만함, 그리고 다른 일면으로 일에 대한 과욕 사이에서 중도를 취하려고 애썼다. 

청교도들이 게으름을 비난한 태도는 근면한 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이 본래 고귀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기 때문에 그랬다. 

청교도들이 게으름에 대해 나타낸 극도의 불쾌감과 노동에 대한 칭송의 일부는, 노동이 창조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이라는 믿음에서 나왔다. 

노동을 소명으로뿐 아니라 창조 질서로 본 청교도들은 일이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청교도의 신앙은 성스러움의 가장 두드러진 율법과 은총의 놀라운 결합이었다.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영향과 그의 말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매일매일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서두르지 않는 삶이었다. 

청교도들은 유우머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영적 헌신의 깊은 지각을 소유한 다채로운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고 또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가장 좋은 남편과 아내, 부모, 자녀, 주인 그리고 종이 되어야 하며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한 교리가 모욕을 당하지 않고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교리가 자기들의 신앙을 고양시켰다면 죄악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죄에 대한 경향성은 물론이고 총괄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의 악에 대한 가능성을 알고 질병 중의 질병이며 모든 사람의 병의 근원인 죄를 밝혀 내는데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의 헌신적인 생활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이 된다. 청교도들은 교리의 순수성에 대하여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청교도 성직자들은 그들의 양떼들을 다정하게 푸른 목장으로 이끌어 주었다. 

청교도 목사인 리챠드 그린햄과 그의 사위 존 다드 목사는 “복음은 무지한 영혼들에게도 그들 자신들의 어휘와 표현으로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였다. 청교도들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영적 신앙에 신실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경적 교리를 실행한 결과였다. 

청교도들의 헌신적인 생활에 대한 열쇠는 훈련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떤 운명(運命)에 내어맡기는 생활이 아니라 철저히 훈련된 신앙생활이어야만 한다. 청교도들의 마음 중심에는 절대적으로 권위있는 성경말씀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청교도들의 생활을 지배하시고 훈련시키셨다. 

청교도 토마스 크랜머는 “성경책은 가장 값비싼 진주요, 지구상에 남아있는 가장 거룩한 유물이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강조점을 포함하였다. 도덕적 율법은 훈련된 성도들에게서 그 권위를 발휘하며 또한 그것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이란 도덕적 율법을 지킬 아무 의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도덕폐기론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청교도들은 율법의 실제적 적용을 강조하였다. 즉 죄를 견제하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며 성도들의 행위를 이끌어 주었다. 이점에서 청교도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칼빈은 “율법은 죄인이 그의 커다란 실패와 궁핍함을 깨닫도록 하며 또한 성도들이 거룩함과 정직함을 얻기 위해 싸워나가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될 수 있으면 그들은 바로 세상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경건되게 살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볼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를 중요시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기에 오직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았다. 토마스 왓슨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존 오웬은 "성경의 권위는...... 그 신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고 말했다. 존 오웬은 성경이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한치 오차도 없이, 또 아무런 오류도 없이 보여 주는 계시"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그것을 구원에 관련된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여러 방면으로 개방해 두었다. 리챠드 십스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규준도 얻을 수 없다. 단지 성경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규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규준은 모범에 의해서 보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청교도들이 성경 권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는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적용했는가를 보면 된다. 그들은 경제, 정부, 가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제에 성경 본문과 성경의 모범을 끌어댔다. 청교도들은 제한된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아니면 전적인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그들의 이론뿐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볼 때 그들이 성경을 삶 전체를 위한 규준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교훈과 신학을 가르치는 책이었지만, 반드시 그 정도에 머무는 책은 아니었다. 성경은 효험 있는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감화하는 비범한 효능을 가진 책이었다. 

청교도들이 성경을 대한 기본 자세는 성경이 항구적으로 적합하고 모든 세대에 대해서 새로운 책이라고 믿는 자세였다. 윌리엄 에임즈는 이렇게 쓴다. 

“성경의 여러 부분이 특별한 사건을 다루고, 특별한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들이 마치 직접적으로 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기나 한 듯, 오는 모든 세대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똑같은 교훈이 되게 하시려 하는데 있다.” 

암브로스는 성경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의 삶에서 매일 입증되고 있다”라고 말했고, 토머스 구지는 성경의 명령과 경고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명령과 경고를 마치 하나님께서 그대 이름을 부르면서 내리시는 것처럼 받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성경 역사에 투영시켜서 읽었다. 

성경이 그들의 상황을 향해 말씀한다고 확신한 청교도들은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존 프레스톤은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려면……성경을 연구하고 착념하며, 주야로 묵상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권면은 모든 청교도들을 향한 것이다. 리처드 그린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들으며 그것에 관해 토의하라”고 충고했다. 

청교도들은 성경 읽기가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어떤 결과가 자동적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이것은 대지가 비를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것은 각 개인이 그 말씀에 얼마나 착심하고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청교도들은 성경 읽기를 마치 도약판 같은 것으로 보았다. 도약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내용을 의지적으로 인정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존 번연은 “사람의 심령과 성경이……서로를 포옹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달콤한 의존과 동의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지적 동의는 청교도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청교도들이 성경을 행위의 근본으로 보게 된 원인은 성경이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 까닭이다. 로버트 해리스는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듣고 우리 마음에 정성을 다해 간직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 양심의 저 깊은 곳에까지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능히 고친다”라고 말했다. 코넬리우스 버지스는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성경에서 놀라운 보호와 구원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 일어난 일을 보고 그저 놀라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사를 읽으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같은 보호와 구원을 지금도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인크리스 매더는 성경이 “마음에 감추어 둔 은밀한 생각까지도 추적한다”라고 썼고, 헨리 루킨은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성경에 나오는 명령이나 금령(禁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명령들을 우리에게 내리셨고, 우리를 향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하늘에서 각별한 메시지를 주신 것인 양 적용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정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동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성경의 능력을 철두 철미 신봉했다. 에드워드 레이놀즈는 “바위와 같이 굳고 완악한 사람이라도, 말씀은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 망치이다. 사람이 아무리 찌르는 가시와 찔레 같더라도, 말씀은 그것을 단숨에 삼켜버릴 수 있는 불이다”라고 말했다. 조지 길레스피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양심에 도전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말했고, 니콜라스 우달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의 소멸하는 불”이라 불렀다. 굿윈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 능력이 과시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경험했다. 이 능력으로 말하자면 마치 불과 같고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같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성경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고 민첩하게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다.” 

마틴 루터가 법정에 서서 “말씀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고 했는데, 영국인들에도 그와 비슷한 신앙 위인이 있었다. 그는 1555년에 재판정에 선 존 로저스이다. 이단 심문소에서 열린 로저스의 재판에서 메리 여왕의 재상(宰相)이기도 했던 스티븐 가디너 주교는 “천만에. 그대는 성경으로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다. 성경은 침묵하는 책이다. 다만 살아 있는 주해가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저스는 여기에 대해 “아니올시다. 성경은 엄연히 살아 역사합니다”하고 담대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 대답은 2세기 동안 청교도들의 불문율과 같은 구호가 되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누구나 성경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성경을 삶의 모든 영역에 빛과 지침을 주는 소중한 책으로 여겼다. 게다가 그들에게 성경은 살아 있는 책이요 사람의 행동과 운명에 독특하고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었다. 

한편 청교도들은 지금도 유효한 성경 해석의 원리를 유산으로 남겼다. 풍유적 해석을 거부하고 일상적인 의미를 강조한 점, 진리를 구하는 모든 진실한 구도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조명을 믿고 의지한 점, 본문의 문맥에 유의한 점, 성경의 통일성을 믿은 점, 율법과 복음을 성경의 양대 주제로 인식하고 부각한 점, 그리고 성경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국면에 민감하게 반응한 점 등이 그들이 남긴 유산이다.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무엇인가? 제네바 성경 서문에 나오는 글이 적절한 답변이 되리라 믿는다. “성경은 우리가 갈 길을 비추는 빛이요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이고 환난 당할 때 위로이며, 사탄을 대적하는 방패요 검이고 모든 지혜의 보고요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이며, 그분의 은혜를 웅변하는 간증이고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유일한 양식이요 영양이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야 함을 역설했다. 토마스 구드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였다. … 그러므로 … 이 하늘의 공적 비 서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의 또는 인간들 자신의 이해력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다. … 그 분이 홀로 그 밭에 지식의 보화들을 숨기셨으므로 그분만 이 그 보화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가슴을 열 고 하나님의 연구실을 열어 하나님의 모든 원고들과 문서들로 나아갈 수 있는 지식의 열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익인가! 

보다 덜 아기자기하지만 보다 더 명확하게 존 오웬은 같은 주장을 한다. "나는 …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겸손하고 기도하고 가르침을 잘 받고 순종하는 심령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의 정신이 관념들로 빈틈없이 채워졌을지라도 그는 영적 실재들의 깨달음에 절대로 이르지 못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이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하였다. 

1.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다른 성경은 이 본문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3.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해 서 인간에 대해 어떤 진리들을 가르치는가? 


4. 이 진리들은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들의 설명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5. 이 진리들은 어떤 경험들을 묘사하거나 서술하거나, 또는 창조하거나 고치고자 하는가? 이 진리들은 어떤 실제적 목적을 위해 성경에 존재하는가? 


6. 이 진리들은 우리의 실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적용되는가? 이 진리들은 현재의 어떤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무엘 러더포드는 “신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다. 믿음으로 만사를 행하는 이가 건전한 이성이 빛으로 만사를 행하는 이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 청교도 설교가 리처드 로저스가 에섹스 주 웨설스필드에서 강론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로저스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선생님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너무 빈틈이 없으십니다.” 그러자 로저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러십니까, 전 한치도 빈틈이 없으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코튼 매더의 일기에서는 이런 유의 글이 눈에 띤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를 낮춰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사고를 해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부단히 자기를 미워함으로써, 또 그를 둘러싼 역겨운 환경에 대해 민감해짐으로써 하늘나라에 합당한 행동을 취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최종적인 권위라고 했다. “청교도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믿음의……완벽하고 온전한 준칙(準則)으로 본다. 그들의 목표는 종교, 국가, 그리고 개인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참고서적 : 박영호 지음, 청교도 신앙, 기독교문서선교회 

리랜드 라이큰 지음,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 생명의말씀사


출처 : Amazing Grace 블로그 http://blog.daum.net/fcsuni/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