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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story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의 뿌리가 살아있는 교회 - 구세군 진보교회

by 초코우유 ∽ blog 2024. 5. 18.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의 뿌리가 살아있는 교회 - 구세군 진보교회

100년의 희망을 향하여 비전과 목포를 정하여 힘차게 전진

 

 강봉구 사관 (구세군 진보영문 담임)

2024.04.02.

 

*진보교회의 공식 명칭은 '구세군 진보영문'(The Salvation Army Jinbo Corps)이며, 이 글의 제목에는 교회로, 본문에는 영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위치한 구세군 진보영문은 1915년 이전부터 대구지방[1]에 소속된 진안기도실[2] 혹은 진안지영[3]으로 운영되어 복음의 역사를 시작해왔다. 진보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비어있는 건물[4]을 무상 대여받아 1926년부터 약 1년 동안 운영되고, 진보면 진안1동 543-2번지[5] 150평의 대지 위에 건평 12평의 회관과 6평의 주택을 매입하고 이촌영문 조동윤[6] 참위가 1927년 3월 5일 진보영문의 첫 번째 담임사관으로 겸임하여 본격적인 복음의 행진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932년 6월 10일 비로소 이촌영문의 지영에서 진보중앙영(박천수 참위)으로 독립하였다.

 

독립운동가 권태원 사관

진보영문은 같은 경북지방 영덕지역에 소속된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의 낙평영문, 가까운 진보면 이촌리에 있어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이촌영문과 함께 3.1 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유서깊은 역사의 산실이다.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진보장터(시장)와 맞닿아 있는 진보영문은, 당시에는 독립된 영문으로 개영되어있지 않아 그 명칭이나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지지는 못했을지라도, 낙평에서 태어나 이촌에 주소를 둔 영문학생 교사 출신[7]으로 구세군 사관이 된 경상북도 영해와 진보 독립만세운동의 주역 권태원 사관이 진보 장날에 이촌영문 군우 50명에 포함되어 300여 명이 벌인 만세운동의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하였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라 여겨진다.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17년 10월 1일 임관받은 권태원 사관은 평안남도 진남포 신실영문과 1918년 파주의 교하영문[8]에서 사역 후 1919년 2월 구세군 사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낙평영문에서 신앙생활 중, 서울까지 갔다가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낙평 장로교회의 지인 김세영 조사에게 제안받아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하고 3월 18일 오후 1시 영해장터에서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19일까지 진행된 만세운동은 주재 경찰, 포항에서 지원해 온 헌병부대, 대구에서 온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인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권태원 사관은 며칠 후 3월 28일 오후 2시 청송군 진보장터에서 구세군이 중심이 되어 직접 만세 시위의 거사를 이끌었다.[9]

 

독립운동가 박춘식 정교

진보영문에는 또 한 분의 항일 독립운동가 박춘식 정교(1928~1987)가 있다. 그는 부친 박세원을 이어 진보영문에서 장년재무(1963~1966)와 선교정교(1967~1987)의 직임으로 영문을 섬기며 군우들 뿐 아니라 많은 지역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일제가 거세게 구세군을 탄압하고 박천수, 송성호, 천병철 등 진보영문 담임사관들을 심문하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사직하게 만들던 것을 보아온 박춘식 정교는, 안동 농림 고등학교(현 한국생명과학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1944년 10월경 황병기, 권영동, 이갑룡, 장인덕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다수의 단원과 무기를 확보한 뒤 깊은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동시다발적으로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고 의성까지 진출, 일본군 제24부대와 결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는 등 임박해진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도우려 하였고, 나아가 조선회복연구단은 성격과 조직이 비슷한, 명성회와 연합해 경찰서,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한 후 의성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할 것을 계획하는 등의 거사를 1945년 3월 10일 일본 육군 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다가,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1945년 3월 10일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러야 했고 해방을 맞아 가까스로 출옥하게 되었으며, 2004년 사후 그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랑스러운 구세군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3월부터 1948년 8월 18일까지 천병철 부관이 제9대 담임사관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이후 부임한 손병목 참위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잠시 진보를 떠나 피신했다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촌영문 담임으로서 진보영문을 지키며 영문을 건축하였다. 이때 박춘식 정교는 기독교인이며 또 진보면 배급소장인 이유로 공산군의 체포명령이 있어 산속으로 약 1년 8개월을 피신해야 했다. 추석 무렵 다시 돌아온 그는, 영문의 군우가 증가하고 영문 회관이 낡고 좁아짐으로 인하여 1948년에 영문에서 구입한 진안2동 31-2번지(현재 사관주택 서북쪽 부지) 100평의 대지 위에 두 번째 영문회관의 건축 준비를 시작하였다. 1951년 가을, 교회를 건축할 나무를 어린이로부터 모든 군우들이 박춘식 정교의 집과 엽연초 생산조합으로 손수 옮기고, 목수 7명이 다듬어서 28평의 영문을 건축하였으며, 1952년 4월 10일 장운용 전장서기관의 인도로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구세군 진보교회 100주년 표어

1975년 진안리 30-7번지 2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1979~1980년 세워진 현재의 세 번째 영문회관 건축과 1982년 주택 신축, 2018~2019년 건축과 다름없는 수준의 대대적인 영문 리모델링으로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면서 97년간 이어온 진보영문의 믿음의 행보는, 이제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정위 강봉구, 강지애 사관은 “감사의 100년, 희망을 향하여”라는 100주년 표어와 함께 군국의 비전선언과 사명선언, 핵심가치를 실행하기 위하여 진보영문 사명선언문, 영문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영문의 믿음의 역사가 계속되며 지역사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조건과 차별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본질의 사명을 감당하는 영문이 되기 위해 힘써가고 있다.

 

 

[1] 대구지방은 1922년 10월 30일 영덕지방을 분리하고, 사령관 신태빈 정령은 허곤 부관을 초대 영덕지방관으로 임명하였다.

[2] 조선총독부 관보, 제1353호, 1917년 2월 9일. 기도실은 현재 교회 조직의 구역의 개념과 유사함.

[3] 구세신문, 1916년 4월호, 1915년도 극기연보 모금 현황에는 대구지방에 소속된 “진안”으로만 표기.

[4] 진보면의 역사자료를 통해 그 위치와 규모 등을 추후 확인할 예정이다.

[5] 『구세군이촌영문 100년사』(임흥근, 구세군이촌영문, 2013)에서 최초 확인되는 1938년의 진보영문 주소지이고, 2024년 현재 진안1리 마을회관의 남쪽으로 인접한 앞마당 방향이다.

[6] 조동윤에 관하여는 연구가 필요하다. 『구세군이촌영문 100년사』(임흥근, 구세군이촌영문, 2013)에는 조동운으로 등장하고, 저자 임흥근(천병철 부관의 외손)은 『한국 구세군 연혁』(구세군출판부, 2013)과 『한국 구세군 100년사』(김준철, 구세군출판부, 2008)의 구세군사관학교 입학생/졸업생/신임사관 명단에 등장하는 조영운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근에 위치한 낙평영문 역대사관현황에는 동일한 조동윤(1930-1931) 사관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동운은 조동윤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7] 구세신문 1917년 1월호

[8] 교하영문은 1919년 3월 10일 파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 임명애 부교와 염규호 정교가 소속되었던 교회이다.

[9] 황선엽, “3.1절을 앞두고 기억나는 사람: 구세군의 독립운동가 권태원 사관”, 구세공보, 201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