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분없는 카테고리

'고난'(Passion)은 최상의 '열정'(passion)

by 초코우유 ∽ blog 2011. 10. 15.

인생의 밑바닥에는 비극이 깔려 있다. 삶의 표면이 깨어지는 경험을 겪을 때면 ‘삶’은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삶의 밑바닥에 슬픔이 있음을 가장 위대하게 표현한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보여주는 곳이다. 슬픔과 상실을 통해 모든 외적인 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는 실체를 발견한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경악할 정도의 비극 가운데 우리는 어디서 빛을 얻을 수 있는가? 재난과 참혹한 일들,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재산과 생명들을 잃는 슬픔들, 가슴이 찢어지는 일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바르게 관계하는 자들은 자신을 에워싼 고난,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슬픔을 당함으로써 오히려 허상에서 벗어난다. 슬픔 속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더니 참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는 이 구속의 바탕 위에 서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쏟아 부으신 사랑에 힘입어,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의지를 죽이기로 결단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직관적인 분별력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영적으로 어릴 때는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지만, 어느덧 자기 의지를 영적으로 죽여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관점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받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어떤 마술적인 힘으로 오해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피란 바로 생명이다. 우리가 보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사람을 위해 부어졌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된다는 의미는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해 흐르게 된다는 의미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그 순간 초자연적인 역사가 발생한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흐른 바 되어, 우리로 하여금 주의 뜻을 아주 놀라울 만큼 쉽게 행하도록 만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영예를 걸고 약속하셨다. 만일 우리가 내 생명의 피를 주님께 두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동기만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될 때”, 우리는 단 한 가지의 동기를 갖게 되는 기적을 체험한다. 이후로는 ‘무엇을 기도할까’ 하고 청원의 내용을 궁리할 필요도 없다. 저절로 떠오른다. ‘위대한 일들’은 오직 기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도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게 자연적인 질서에 속한 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삶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는 모든 새로운 체험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한다. 기도에도 하나님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더욱 깊숙이 들어와 익숙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일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상대를 느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이는 다시 영적인 체험의 첫 단계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우리의 영광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아무리 심해도,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깊어도 그리스도께서 그보다 더 깊게 우리를 만져주신다”는 것을 늘 인식하는 데 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도 이것을 믿어야 한다. Passion(고난)이라는 단어는 이 땅에 내려오면서 인간의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으나, 이 ‘고난’이 주님과 연결되면 주님의 인격적 속성이 예외적인 방법으로 드러나는 최고의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고난(Passion)’을 깨닫는 자들은 주님을 향해 ’열정(passion)’을 갖게 된다. 성령이 임하시면 고난이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정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 『도움의 장소』 중 에서

 

출처: CEL 카운셀링 http://celconsulting.co.kr/

'구분없는 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0) 2011.11.14
사도바울의 선교사역 연대기  (0) 2011.10.16
카드섹션 - 목동과 기차  (0) 2011.09.21
백인우월주의란?  (0) 2011.09.03
추석 인사  (0) 201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