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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by 초코우유 ∽ blog 2011. 11. 14.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Ⅰ. 서론

20세기 후반 신학의 큰 특징은 신학의 관심과 강조점이 바뀐 데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정통교리로부터 정통실천으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이, 말씀 전파보다는 인간의 인간화가 강조되었다. 한마디로 세상성에 대한 발견의 고조와 1960년 이후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세속화되고 신학은 급진화 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역할을 한 사람이 본회퍼였다.
그의 핵심사상이자 혁명적 개념인 무종교적 시대와 무종교적 기독교, 성인된 세계와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은 기독교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젊은 신학자들에게 감명을 줌과 동시에 세계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2천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의 무덤은 찾을 수 없어도 그의 이름은 교회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것처럼, 그의 충실한 제자였던 본회퍼의 이름도 교회의 역사를 만들어 간 다른 많은 제자들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현대신학자 20인: 디이트리히 본회퍼 편 p.95) "1960년대의 암울한 미국에 최근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악마적인 체제에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당시 젊은 사상가들의 마음에 파고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20세기 신학 p. 232) 따라서 본회퍼의 삶은 당시의 모든 사람에게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본회퍼를 제외하고 20세기 신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특히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 까지도 사로잡는 본회퍼의 매력은 그의 삶과 사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다. 아직도 그를 기리면서 플로센뷰르그 한복판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그 형제들 사이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뷰르그에서 사망하다"(현대신학자 20인)

따라서 필자는 현대 신학 논쟁의 근원이 되는 그의 핵심 사상인 "성인 된 세계와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을 구체적 논제들에서 살펴보고, 그의 저작에 나타난 중요한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왜 그가 현대 신학에서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현대 신학과 그의 관계성을 추적함으로서 답을 찾고자 한다.
참고로 "미국의 갓세이는 본회퍼의 생애를 1) 1906-1932: 히틀러 이전 시대, 2) 1933-40: 교회의 반 히틀러 투쟁시대 3) 1941-5: 전쟁의 와중으로 나누고 각각 1) 신학적 기초의 확립 2) 신학의 적용 3) 신학의 단편화로 나누었다. 갓세이는 본회퍼의 주된 관심은 기독론과 교회론이라고 지적하는데, 베트게는 이를 계시의 구체화라고 일컫는다." (본회퍼의 신학사상 p. 34)
그리고 베트게는 "본회퍼의 지적 여정을 세 기간으로 나눈다.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시기, 고백 교회에 가입하여 체제와의 갈등을 겪으며 사람들을 가르치던 시기 그리고 히틀러 체제에 대한 저항기가 그것이다. 제1기에 본회퍼가 가졌던 주된 관심은 교회를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간기의 그의 관심사는 대가를 지불하는 제자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는 세상 안에서의 거룩함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20세기 신학 p. 236)

Ⅱ. 생애와 저작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용기 있게 항거하고 저항한 끝에 투옥되어 39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된 본회퍼의 삶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었고,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삶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

본회퍼는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명문가 집안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본회퍼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로 예나 대학 교회사 교수로 명성을 떨쳤던 칼 폰 하제의 증손녀였으며, 그의 외가는 많은 신학자를 배출한 신학자 집안이었다.
본회퍼는 열 살 때,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그가 목사와 신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14세 즈음이었다. 그의 가족은 이런 그의 결심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그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가 확고하게 결정하자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1923년 가을 본회퍼는 튀빙겐 대학에 입학해서 폭넓은 공부를 했다. 특히, 그가 로마를 방문 했을 때 그곳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교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1924년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보루인 베를린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하르낙(Adolf Von Harnack), 리츠만(Hans Lietzman), 루터 연구가인 홀(Karl Holl), 제베르크(Reinhod Seebreg), 다이스만(Adolf Deissmann), 젤린 (Ernst Sellin) 등의 가르침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과 그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익숙하게 되었다.
특히 본회퍼는 제베르크 밑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1) 성경의 역사적 해석과 영적 해석은 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둘이 교의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2) 17세기 루터 정통주의 교의학에 나타난 이성과 계시, 3) 교회와 종말, 4) 17세기 루터 정통주의 교의 학에 나타난 종말과 내세에 대한 교리, 5) 프랑크의 성령론과 은총론이 그것이다. (John D.Godsey. Theology of Dietrich Bonhoeff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pp. 20-1 (본회퍼의 신학 사상 p 14. 재인용)

본회퍼의 처녀작으로 1927년에 작성된 [성도의 교제: 교회의 사회학에 관한 교의학적 연구]는 "칼 바르트가 "신학적 기적"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탁월한 논문이었다. 이것은 사회철학과 사회학을 이용하여 교회의 개념과 구조를 해명한 것으로 본회퍼는 이 논문에서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본회퍼는 1928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어를 말하는 교회를 섬기다가 일년 후에 1929년 베를린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했다. 그 후 그는 1930년부터 일년 동안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이곳에서 그는 리이만으로부터 종교철학, 라인홀드 니버로부터 종교와 윤리학을, 웨버로부터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베일리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다. 여기서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현대신학논쟁 p. 264)

"1931년에는 [행동과 존재]가 출판되었다. 이것은 [성도의 교제]에 이어 초기 이론적인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두 작품이 모두 기독론을 밑에 깔고 있는 교회론을 주제로 하고 있다. 즉,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공동체로서 실존하신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모두 교회를 통한 계시의 연속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가 이미 초기 바르트의 영향 밑에 저술되었고 바르트보다 먼저 "계시"를 "교회"와 밀착시켰으며 교회의 사회학적 측면을 신학적으로 수용하였다면 [행동과 존재]는 바르트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바르트의 초월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교회"를 통한 "계시"의 구체성, 현존성, 연속성을 강조했다." (본회퍼의 신학사상 pp. 102-3)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부에서 초월적 행동과 존재의 문제-철학적 인간이해에 있어서 인식론적 문제, 제2부에서 계시에 있어서 초월적 행동과 존재의 문제-이 둘의 종합인 교회, 제 3부에서 구체적인 기독론적 인간론, 즉,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초월적 행동과 존재의 문제를 취급한다." (본회퍼의 신학 사상, p117)

그는 1931년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 대학에서 "20세기 조직신학의 역사", "창조와 죄", "교회의 본질", "기독론"들을 주제로 강의했다. 창조와 죄에 대한 그의 강의록은 1933년 [창조와 타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것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본회퍼의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독특성을 발견하고 이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했다.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 유비가 아닌 관계의 유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유로운 인간이 자신을 위해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자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현대 신학 논쟁 p. 265)
그리고 본회퍼는 "미국 방문을 경험을 토대로 [사회복음주의]라는 짧은 글을 썼고 11월에 가서는 "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을 위한 교회의 기도"라고 하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여기에서 타계주의와 역사내적 내재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긴장 관계를 논하고 있다." (본회퍼의 신학 사상 p. 19)

"기독론에 대한 그의 전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에 있었다. 그는 [옥중서간]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비그리스도인 세계에서도 주가 되겠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신의 세속화 p. 28)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예수에게 하나님으로서의 자격 부여라는 의미이지 그에게 제2의 신적 본질을 첨가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임을 강조했다."

"본회퍼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은 히틀러의 집권과 제 2차 세계 대전이었다. 히틀러 정권은 고백 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투쟁을 하게 했으며, 2차 세계 대전은 본회퍼로 하여금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지하 저항 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그리고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의 신학 사상 p. 28) 그리고 그가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는데 이 내용은 새로운 지도자의 개념을 직책이 아닌 사람에게 두는 우상적인 지도자 원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본회퍼는 고백 교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일적 기독인들"을 논박하고 유대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내용으로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니묄러를 편집인으로 하여 [신앙 선조들과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966년에 [중심이신 그리스도]가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베트게가 학생들의 노트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반히틀러 투쟁의 와중에서도 본회퍼가 1933년 여름 베를린에서 기독론에 대한 강의를 녹취한 것이었다. 이것의 내용은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 나를 위하여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조직되었는데 당시에 강의가 도중에 중단되었음으로 제 3장은 강의할 수 없었다." (본회퍼의 신학사상 p. 21)

"그의 저서들 중 [나를 따르라: The Cost of Discipleship]는 본 회퍼 생존 당시의 저작으로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해명했다. 그는 여기서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생생하게 대조시켰다. 값싼 은혜란 교리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 쉽게 찾아온다고 믿는 신앙의 형태,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관습적인 기독교"를 가리킨다. 본회퍼의 말을 빌린다면,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고 용서를 전하는 것이며, 교회의 훈련 없이 세례를 주고, 신앙 고백 없이 성찬을 행하며, 통회함이 없는데도 사죄를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값비싼 은혜는 구원이 값진 것임을 선언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그의 아들을 대가로 요구했고, 동시에 우리에게 제자로 사는 삶, 즉 순종을 요구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루터는 수도원으로부터 세상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값비싼 은혜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예수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 속에서 사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옥중 서간]의 중심 주제가 된다." (20세기 신학 p. 239)

[성도의 공동생활: Life Together]은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생활을 탐구한 내용으로 그가 1935-40년 게슈타포에 의해서 발각되기 전까지 운행했던 불법 신학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이다. "쿤즈는 이 책이 '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에 의하여 살아있는 크리스쳔 공동체에 관한 가장 훌륭한 묘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본회퍼의 신학사상 p64) 이것은 제1장이 공동체, 제 2장이 다른 사람들과 사는 하루, 제3장이 홀로 사는 하루, 제4장이 섬김, 제 5장이 죄의 고백과 성도의 교제로 되어있다. (본회퍼의 신학 사상 p. 206)
1939년 그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움으로 독일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압제받는 독일 기독교인 형제들을 버릴 수 없어서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오게 된다. 본회퍼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왜 내가 미국에 있는지 모르겠다.... 독일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짧은 기도는 나를 압도했다... 사태가 악화될 경우 나는 미국에 머무를 수가 없다"라고 했으며 그가 귀국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배에 오르니 미래에 대한 나의 착잡한 심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현대신학자 20인)

1940년 여름, 본회퍼는 비밀 정보요원으로 채용되어 정보원과 저항 운동가라는 이중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기독교 윤리학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심 주제들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고, 그는 성육신 사건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세상 성을 강조했다.
1943년 본회퍼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테겔이라는 군 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는데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여기서 그는 "성인 된 세계"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에 대한 개념을 세웠다. 그는 세계가 중세 이후 세속화의 과정을 겪어왔고, 인간은 점진적으로 "성인 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성서적 개념과 신학적 개념에 대한 종교적인 견해를 폐기하고 비종교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옥중 서간]이다." 이것은 본회퍼의 후기 사상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그는 옥중 생활 중에, 제자도의 개념과 씨름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제자도란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해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에서 전개한 바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제자도 였고 이것은 그의 기독론 중심적인 사상적 강조 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본회퍼는 당시의 상황 즉, 성숙한 세계가 함축하는 바에 대해 관심을 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선포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앙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교회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신앙을 배제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것인가? 현세적 영향을 배제한 형이상학이라든지, 내면성 등과 명제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에 대답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당시의 상황과 기독교의 메시지를 부합해 보았다. 그런데 그 모든 시도들은 각 개인의 "연약함과 추악함이 들추어 보여진"후에야 비로소 죄인으로 불려질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숙한 세계에 걸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성숙한 이 세계'를 더 이상 복음으로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격 방법은 본질에서 벗어나갔을 뿐 아니라 비열하며 비기독교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속에 흠뻑 젖어 있는 인간의 약점을 들추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과 대면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20세기 신학, pp. 239-41) 이와 같은 내용의 [옥중서간]은 그의 최종적 신학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20세가기 후반의 신학적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본회퍼는 1944년 10월 8일 게슈타포 감옥에서 1945년 2월 7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쇤베르그 마을로 옮겨지다가 모든 저항자들을 처형하라는 히틀러의 특별지령으로 1945년 4월 9일 새벽 미명에, 미국이 그 지역을 해방하기 직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 였다. 이런 본회퍼를 보면서 플뢰센부르그 처형장 의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반쯤 열려있는 감방 문을 통하여 나는 본회퍼 목사님을 보았는데 그는 죄수복을 벗기 전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에 감동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형의 현장에서 역시 짧은 기도를 끝내고 그는 태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형틀을 향해 올라갔다. 몇 초 후에 그는 죽었다. 이곳에서 50년 동안 의사 일을 보았으나 본회퍼 목사님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I New Dietrch Bonhoeffer, ed. Wolf-Dieter Zimmermann Ronald Gregor Smith, trans, by Kathe Gregor Smith (N.Y: Harper & Row, 1966). p. 232 {본회퍼의 신학사상 p. 30재인용})

본회퍼의 삶은 실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언행일치의 삶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1960년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과 20세기 신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며 그의 고난에 삶의 동참하고자 한다.

Ⅲ. 성인된 세계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1960년대 급진적 젊은 신학자들이 신학적 토대와 방향을 삼았던 개념인 "성인 된 세계(무종교적 시대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무종교적 기독교)"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인된 세계
성숙한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후기 본회퍼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는 인간은 더 이상 종교나 하나님에 의존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성인 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1944년 4월 30일자로 베게트에게 쓴 편지에서 "성인 된 세계" 혹은 "무종교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본회퍼가 말하는 "성인 된 세계"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종교가 필요 없는 세계가 곧 "성인 된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자율운동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성인 된 세계"에 대한 진술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것은 당시 종교적 상황에 대한 진단이며 새로운 종교에 대한 예측이다." (현대 신학 논쟁, pp.270-1, 요약)
그가 말하는 "성인 된 세계"는 현대인을 성인 된 세계에 살고 있는 "성인 된 인간"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현대인은 종교가 필요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 아래 모든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결국 자원들과, 환경, 사회가 제공하는 것에 의존하여 하나님 없이 살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세계로 하여금 한계 상황 속에서 신 없이 완결되기를 요구하는 계몽주의의 성숙성 이념의 어두운 측면을 수용한 본회퍼는,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을 자기 성숙성으로 성장하게 하셨음으로 이제는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본회퍼는 성서의 복음으로부터 종교의 옷을 벗기려는 성서개념의 세속적 해석을 하였다. 즉, 죄와 죽음을 인간 실존의 한계 상황으로 간주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실존철학이나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입장을 거부했다. 그는 한계에 직면해서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약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함에서 죽음과 죄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려고 했다." (현대 신학 논쟁, p. 271)
이처럼 "살아 계신 성서적 인격신은 세계와 성숙한 인간을 요구하신다. 그는 결단코 자연과학의 인식가설로 수용되는 작업가설이나 미성숙한 인간의 어려움과 고난을 보호하시는 후견인이나 인간이 채울 수 없는 능력과 지식의 틈을 채우는 자가 아니다. 작업가설이나 후견인이나 틈 채우는 자는 결단코 살아 계시는 신이 아니요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다." 고 했다.

2) 성숙한 세계의 신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의 신"과 "종교의 신"을 구분한다. "종교의 신"은 우리의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피난처와 도피처로 다가오는 신이다. ("고난 때엔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또, 종교의 신은 틈을 채우는 자요, 기계적인 신이라 부른다. 그러나 "성숙한 세계의 신"은 인간의 고난 상황 속에서 관여하지 아니하시고,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숙명이 수행되도록 우리를 버려 두신다.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의 신"에 대한 예를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최후로 절규한 예수의 부르짖음에서 찾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간섭하심 없이 우리 삶의 극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숙명이 가장 쓰디쓰게 수행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를 본회퍼는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숙명이 다하도록 내버려두시는 신에 대한 성숙한 신자의 고백이라고 한다. "
히틀러 저격이 실패한 날, 본회퍼는 "우리는 마치 신 없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비로소 솔직해 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는 삶을 완결하며 살도록 우리를 교훈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무신론을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세계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신 없는 세계 경험을 역설적으로 그의 성숙한 세계의 신 신앙 속에서 통일하고자 하였다.( D. Bonhoeffer, 상게서 8, 1974, p. 178. 조성노, "자유주의 신학의 전개과정 (목회와 신학, 91년 7월호), 재인용)
왜냐하면 종교적인 신 신앙과 무신론 사상과는 쉽사리 제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신 신앙에서는 만일 신이 인간의 고난 상황 속에서 그의 기도를 외면하고 임재 하지 아니할 때, 이 신앙은 쉽게 무신론으로 변모되고 만다. 이러한 재래적인 종교의 신 신앙으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으로 사고하는 "성숙한 세계의 신"에 대한 개념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부재 속에서 우리의 숙명과 고난이 다하도록 내버려두시는 신의 뜻을 인식하는 "성숙한 신앙"이 무신론으로 빠질 수 있는 부분을 막아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신 없는 세계 경험을 역설적으로 그의 "성숙한 세계의 신 신앙"속에서 통일하고자 했던 의도를 알 수 있다.

Ⅳ.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본회퍼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 앞에서 전통적인 기독교를 점검한 결과, 현대가 "무종교시대"라는 것과 현대 세계는 "성인 된 세계"라는 것을 발견했다. "무종교적 시대"의 도래를 주장한 본회퍼는 종교를 떠나서 비종교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종교는 무슨 의미이며, 비종교는 무슨 의미인가?

1) 본회퍼의 "종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종교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본회퍼는 죄를 자기를 위해 존재하려는 욕망이며, 다른 것과의 관계성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종교는 이 자기중심적인 사회성의 파괴에 참여한다. 그는 종교를 죄의 산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존재가 타자를 위한 존재이므로, 하나님도, 인간도 오직 타자와의 관계성에서만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종교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종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저 세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다음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며, 세상 위에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종교를 형이상학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셋째로, 종교는 부분적인 것이다. 종교적 행위는 예배와 종교적 행사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을 종교로 부른 것이 아니라 삶에로 불렀다. 따라서 그는 이제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런 해석은 성경의 메시지와도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신학논쟁 pp. 273-4, 요약)

2) 비종교적인 해석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비종교적 해석'은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다. 성인이 된 세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어야 하는가? 무신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추상적으로 전능함을 말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말해야하는데 하나님의 전능과 초월은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를 위한 삶이며 신앙은 이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초월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 인간의 현실 속에, 무한 자로서 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 십자가에 박힌 예수 그리스도이다.
둘째로, 세상적인 해석이다. 세상적 해석이란 세상 성을 강조하고 세상을 긍정하고 세상 속에서 사는 신앙이다.
"셋째로, 구약 성서적 해석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계의 현실에서만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며, 세상 저쪽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계신다. 따라서 구약적 해석은 세상 가운데, 현실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대신학 논쟁 p. 274)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다음 세상이 아니라 창조되고 보존되고 속량 되고 새롭게 된 이 세계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세상의 분리와 도피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로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회개하고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로 "비종교적 해석"은 교회의 참된 사명의 수행이다. 이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신의 세속화 pp.32-33, 요약)

그러나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은 본회퍼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과제였기 때문에 따르는 문제들, 토의 될 문제들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서 박봉랑 교수의 의견을 들어보자.
1) "비종교적 해석"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하다. 만일 종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고 하나님이 인간의 궁극적 완성이라면 인간에게서 종교는 분리 될 수 없다. 오토가 말했듯이 본회퍼가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는 종교의 모든 현상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영역 안에 있는 일정한 현실 즉, 종교 일반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적인 것의 형태 변화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본회퍼에게 타당한 질문은 종교성이란 것을 기독교에 적용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에 대해서 그는 기독교의 종교적 시대가 지나갔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종교 시대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낮아지시는 하나님인 것이다"고 한다.
2) "비종교적 해석"이 그리스도교의 세상적 해석 또는 후에 발전된 대로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론이라고 할 때 "세속화"라는 표현이 애매하다. 여기서 본회퍼는 현대의 무신의 세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 속에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강조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은 철저한 "십자가의 신학"이다. 본회퍼는 스승과 같이 제자들이 죽기를 바랬고 그 자신이 그리했다. 사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고난 속에서 가지는 희망, 소망, 영광의 약속이 십자가에 너무 가리어졌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고난만이 아니라 타자의 짐을 질 수 있는 것 자체에서 기쁨이 요구된다." 고 한다.,
3) 본회퍼가 "비종교적" 그리스도교와 이 세상성을 강조하고 성인의 세계에서 "신앙의 비밀 훈련"의 필요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요구했을 때 그것은 공간적인 교회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세상적, 윤리적 삶 속에 숨이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 "숨은 교회"를 의미하려고 했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는 시작과 끝이다." 교회는 그에게 현실 도피의 장소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변화되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는 장소이다. 이처럼 "비종교적 해석"은 교회 혁신의 소리이다. 본회퍼의 이런 "기독교의 비종교화"는 그리스도교의 한 형태로 더 이상 값싼 은혜의 종교가 아닌 십자가에서만 존재하고, 자신을 버림받은 상태로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의 종교이다. 즉, 본회퍼는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자직의 교회로도 표현 할 수 있는데 케리그마, 코이노니아의 교회에 디아코니아를 현대에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그리스도교의 비종교화"는 오늘의 시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고도의 변증적인 시도이며, 그리스도교의 생존 방식의 발견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시대에 대한 본회퍼의 예언자적인 통찰과 성서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앙, 그리고 진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총명과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여러 도그마나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예배 의식을 부정하고 예배 행위, 기도, 신앙의 훈련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어떤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가져오려는 한 신학의 시도는 아니다. 이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현실'의 그리스도교의 강조이다. (신의 세속화 p. 35-7, 요약)
이처럼 본회퍼는 많은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것을 학문적으로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없었다. 교회와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묻기만 하고 향년 39세로 일생을 마친 그는 그의 행동과 죽음으로 해답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물음은 오늘도 우리의 물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 신학자 20인: 디이트리히 본회퍼 편, p. 107)

또한, 본회퍼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째로 기독교의 비종교적인 해석이 과연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에서, 바르트의 배타적인 계시의 신학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가 옥중에서 고민한 흔적이 "비종교적 기독교" 또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패러독스적인 낱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에 아직도 현대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현대적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둘째로 히틀러 암살 음모의 정당성이다. 베트게에 의하면, 전후의 독일 교회는 본회퍼를 종교적인 순교자로 보느냐 또는 정치적인 희생자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오래 논쟁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전히 현대 교회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데 즉, 종교가는 정치에 얼마나 깊이 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현대 신학자 20인 pp. 106-7, 요약)

Ⅴ. 본회퍼의 신학적 영향

본회퍼의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은, 현대 신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20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 카톨릭, 신학, 성직자와 평신도, 신학자와 행동주의자, 칼빈파와 루터파 사이에 에큐메니칼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하나의 상징처럼 서 있다. 본회퍼는 자유세계와 철의 장막 양편에서 다 같이 읽히고 해석되고 있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어떠한 약화에도 반대한 그의 부단한 항거와 전체주의에 대한 반항과 자유에 대한 변호 등으로 인해 자유 세계에 있는 크리스챤들에 의해 많은 찬양을 받는다.(말틴. 마티 [본회퍼의 신학 사상] 배한국역, (서울: 컨쿨디아사, 1990), p. 12. ? 재인용) 정통주의자들이 본회퍼의 성서 연구 방법에 대해 다소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의 종합적인 해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충성을 찬양한다
본회퍼의 비종교적 기독교 개념이 자극을 받아 기독교의 세속화론이 일어나고, 이것에 기초해 세속화 신학이 형성되었다. 이 세속화 신학은 후에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 신학 등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특히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는 안 좋은 영향을 받은 대표작이다.

Ⅵ. 세속적 신앙의 현대적 의미

"본회퍼의 신학은 현대 세계에서 존립할 수 있는 기독교의 존재방식을 모색하고 기독교의 세상 성을 발견하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이 오늘날 세속 도시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며, 성숙한 현대인의 신앙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저변에 흐르는 기복신앙에 큰 도전을 준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기복 신앙이 아닌 고난받는 이 세상의 어지러움과 문제와 대결하는 연단 받는 신앙,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이며, 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이야말로 현실의 고난과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세속적 현실의 문제와 일상사에 관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세상 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와 교회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상의 배경은 구체적으로 히틀러 정권에서 고난받는 유대인과 유린당하는 독일 교회의 현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성숙한 신앙 인으로 처형 대에서 순교적인 죽음을 달게 받았다." 그리고 이런 그의 혁명적인 개념과 영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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