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게시판의 128번의 글과 딸린 댓글을 읽으면서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림에 있어 궂이 구세군이어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기에 지체님의 판단과 결단은 존중되어야 하나, 구세군에서 주님을 만났고 헌신의 결단에 이르렀음에도 여러 가지 상처를 안고 타교단으로 신앙의 자리를 옮기겠다는 지체님께 오히려 장교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구세군 병사가 된 제 입장에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구세군하면 자선냄비를 연상하는 일반인들과 같이 그저 기독교 내의 사회복지법인 정도로만 이해하던 저에게 교회 개척과 더불어 얼떨결에 구세군에 소속되다 보니 모든 게 부정적으로 비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용어는 물론이고 집회 문화의 생소함, 하의상달이 용이하지 못한 경직된 조직성, 지나치게 강조되는 창립자 정신 가운데 자가당착적 우월감(물론 다들 구세군 예비병인 관계로 강조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지도자의 부재와 사관 중심적 목회, 문화 콘텐츠 부족 등 아직도 다 열거하지 못한 여러 문제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이 곳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내적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급기야 적지않은 시간을 구세군을 떠났더랬습니다.
그렇게 구세군을 떠나 있던 때에 어느 교회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청년들이여, 불평 불만이 자신을 영적으로 무디어 지게 하고, 대답없는 의문만 생성하십니까?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물음표만 보이고, 기도하는 시늉만 해도 허탄한 생각이 머릿 속을 지배하며,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사람들의 이중적이고 세속적인 모습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애써 성경을 펼치지도 마시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멈추시고 괜히 타인에게 상담하면서 문제를 전염하지 마시고 조용히 홀로 독서를 하십시오. 복잡한 신학이나 신앙서적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리시고 마음에 와닫지 않는 간증 따위도 찢어버리고 그저 현재 불평 불만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과 연관된 책들만을 펼치십시오. 그것이 불평과 불만을 가속화 시키고 더더욱 선동하는 책이라도 기꺼이 읽어 보십시오. 읽다 지쳐 불평과 불만 더 나아가 분노가 극에 달한다면 그 때 무릎을 꿇고 소리쳐 주님을 불러 보세요. 응답 따위는 요구하지 마세요. 그저 속에 있는 불평과 불만만을 소리질러 외치세요. 악을 써서라도 다 토해 내세요. 그러면 그 때에서야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겁니다. 그러나 결코 답을 해주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깨달음만 주시죠. 그럴 때 즈음에 성경을 펼치시면 원치 않아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듣기에 따라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씀이었으나 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준비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신앙적 가치관의 혼란과 구세군에 대한 감정적 대립이 영문을 떠나게 된 요인이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교회를 섬겼던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여전히 머물고 있는 곳이며, 특히 생의 반려자로 허락한 자매가 구세군에서 봉사하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나름대로 딜레마에 빠져있던 때에(보다 솔직히 자매에게 교회를 옮길 것을 종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말씀은 본질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정말 구세군을 바로 알고 있는가?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단시간에 경험한 사실만으로 구세군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인가? 또한 그 편견 가운데 내 신앙의 문제를 희석시키며 영적 무지를 하나님 앞에 변명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히 고백하자면 그 한 편에서는 실증적으로 구세군을 비판하기 위해 이론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오만함과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이후 구세군 관련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세군 교리와 군령군율, 구세군 발전사, 구세군 역사, 윌리암 부드 평전, 브랭글의 자서전과 몇 편의 저작물 그리고 몇몇 번역 출판된 타군국 사관님들의 저서 등 구하기는 힘들었어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선입견을 안고 시작한 비판적 텍스트 읽기였기에 정독은 아니었으나 구세군에 대한 이해의 폭은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칼비니즘에 편향된 신앙이 다양성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고 성결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구세군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해의 폭은 넓어졌다 하나 여전히 주관적 편견을 타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영문 환경의 근원에는 한국 구세군이 안고 있는 조직적 결함에 기인한다는 판단이 또 다시 신앙적 가치관의 상충을 불러올 경우 다시금 일탈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계속 고민하고 있던 때에 여러 사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비난에 가까운 제 일방적 주장들을 묵묵히 때로는 공감하시면서 들어주셨고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주셨습니다.
속에 있는 것들을 다 토해놓고 나니 그제서야 제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더군요. 아마도 사관님들은 제가 가진 안타까움과 비판 못지않게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도 인식하셨겠지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화두만 던져 주시더군요. 독서의 힘이었을 겁니다. 이전보다는 넓어진 구세군에 대한 이해가 던져주시는 화두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질적 문제에 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미혹의 영이 부여한 교만의 함정에서 영적 패배의 책임을 나 자신이 아닌 구세군과 교회에 돌렸음을-
일년 이상의 방황을 접고 영문에 다시 출석하기로 마음을 돌리면서 한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어떠한 가치의 대립이나 신앙적 혼란 가운데서도 다시는 구세군에서 이탈하지 않으리라. 영적 도전에서는 영적으로 응전하며 어떠한 문제든지 구세군 안에서 문제의 답을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거나 현실을 비판하며 개선을 촉구하는 일들 가운데 때로는 교회의 질서를 거스리며 타인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불러온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세군을 사랑하기에 당당히 맞서리라 결심했습니다.
분명히 한국 구세군은 많은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으며, 개혁이 필요한 싯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특히 토론의 부재와 질문에 대한 대답의 부재야 말로 구세군이 안고 있는 취약점 중의 제일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세군의 특성상 사관 중심적 목회와 관료화 한 행정 문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고민과 개선 건의 사항들이 군국 지도부에 전달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관행적으로 오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기에 섣불리 결론 짓거나 대답할 수 없는 상황임은 이해해야 하고, 우리가 인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구세군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독서와 더불어 병행했던 것은 행정 사관회 및 지방 사관회 웍북을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이 열람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에 훔쳐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만 글자 한 자, 숫자 하나 철저하게 살피면서 구세군에 가지고 있던 오해를 상당부분 불식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랬던 점이 제가 지니고 있던 편견과 오해가 직접적으로 거론되고 검토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허수 기입 시정문제나 사관학교 문제, 용어 개선 문제, 개 영문 형편을 무시한 군국 및 지방영 사업 추진 개선 요구, 하사관 전문 사역자 양성을 위한 연구 등 20여 가지 항목에 관해 하루 아침에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문제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세군의 내일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지도부의 검토만 기다리고 따라 가는 것만이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신앙 향상과 영문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면 지속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제 제기와 토론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 세대의 문제 제기에 젊은 사관님들이 귀를 열고 있다는 점과 구세군인 모두가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합심으로 기도하면서 스스로가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상반된 의견의 충돌로 아픔과 상처를 낳을 수 있겠지만 마음 중심에 구세군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지체님께 부탁드리건데, 구세군을 떠나기 앞서 한 번 더 기도하고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짧은 글을 통해 피상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오랜 기도와 고민이 있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 지에 대해 어떤 답을 주실 수 있을런지요? 교회 내부의 문제일 수 있고 구세군이 지니고 있는 한계일 수도 있고 개인의 신앙 문제일 수도 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의 짐과 마음의 상처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님이 남긴 글의 댓글에 황무지를 개간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는 짧은 탄식의 글이 있더군요. 예전에는 구세군이 황무지라고 한다면 동의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만 이제는 결코 구세군이 황무지가 아니라고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개간하고 씨를 뿌렸으나 원하는 만큼의 결실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금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다보면 머잖은 장래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황무지를 개간했기에 여전히 뽑아 내지 못한 잡초와 깊이 뿌리박힌 돌들이 있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여전히 많은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언제고 한계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지체님처럼 하나님 앞에 일평생 헌신하기로 다짐하신 분들이 더욱 더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재차 부탁드리건데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과 문제를 내어 놓으십시오. 필요하다면 영문을 옮기십시오. 그리고 안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 독서를 하십시오. 신랄하게 비판하십시오. 다 토해 놓으세요. 그리고 문제를 다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구세군을 떠나기를 원하신다고 판단되시면 주저없이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세군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하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본인이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름조차 알지 못하나 지체님을 위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메일 주십시오. 함께 고민하기를 원합니다. 임마누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