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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사회학

[스크랩]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by 초코우유 ∽ blog 2016. 3. 11.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 알라딘의 요술램프 지니처럼 내가 바라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믿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고, 신앙생활의 연차가 쌓여갈수록 크리스천인 내가 어떻게 올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요즘 우리교회는 사순절 새벽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사순절 기간이 되면 진행하는 큰 행사다. 평소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 기간이 되면 새벽예배를 안 나오던 모든 성도들도 다 나와야 한다.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교회에서는 크나큰 죄인이나 다름없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은혜를 사모하여 열심히 새벽예배에 참석했겠지만, 이번에는 새벽예배 나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일도 많아졌고, 휴일도 없이 야근하며 일하는데 몸이 지쳤다.

목사님의 말씀이 듣고 싶지 않았다. 매번 똑같이 규정된 틀을 가지고 말씀 하시는 게 너무 싫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기도해야 산다고 예배에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말씀...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그래야 잘된다고, 그래야 시험에 안 든다고... 그런 이분법적 설교는 나를 늘 죄인 만드는 것 같았다. 죄인을 만들어서 교회에 꼭 붙들어 매어 놓아야 목사님의 맘이 편하신 건 아닐까?

하나님을 잘 믿어야 잘된다. 복 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내 귀에는 거슬리게 들렸다.
자꾸만 노력하라는 게 싫었다. 나는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도 버거운데... 무언가 자꾸만 해야 하고 책임을 부여하고, 통제 당하는 게 싫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기쁨으로 하면 안 될까? 좀 기다려주면 안될까? 왜 교회는 계속적으로 나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목사님은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성도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성도들의 발목을 채울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 같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구역장교육, 교회학교봉사 등 성도들을 묶어두어야만 마음이 편하신가보다. 그것도 모자라서 보고서를 만들어 새벽예배에 몇 번 나왔는지 수요예배, 철야예배에는 빠지지 않았는지 성경은 몇 장 읽었는지 체크한다.

이번 한 주간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성경을 많이 읽었으면 너무 뿌듯하게 보고서에 당당하게 쓴다. 나는 예배를 잘 드리는 성실한 크리스천이라고... 그러나 예배에 잘 참석하지 못하고 성경말씀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휩싸여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죄인이 된다.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교회가 모든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단지 보여 지는 모습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큰 조직을 움직이려고 하니 평가시스템이 없이는 사람을 관리할 수가 없는 건 아닐까? 사회에서도 우린 너무 많은 평가를 당하는데 교회에서마저 성도들을 관리하기 쉽도록 평가하는 게 나는 못마땅하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돌봄’은 실천하지 못하면서 성도들에게 너무 많은 책임만 부여한다. 나는 교회 모임 안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단 한 번도 말해본적이 없다.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사님께서 ‘믿음이 없으니까 자살하고 그러는 것이다’ 라는 얘기를 설교시간에 수 십 번도 더 얘기 하셨다. 그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 80%는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교인들은 자주 들었기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목사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이 교회 공동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공동체에 내 아픔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교회와 목사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교회의 시스템을 잘 따라와야 낙오되지 않는 성도이고, 이들만 잘 관리하면 교회는 성공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일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소외된 자, 마음 아픈 자, 교회에서 낙오된 자를 찾아다니셨다. 교회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감싸주셨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엄하게 꾸짖으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것은 교회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안 다니는 우리가족은 교회에 규정된 틀에 속할 수 없었다. 난 그게 너무 못마땅했다. 우리가족도 모두 교회에 나와야 하는데... 그 기준을 맞추려고 하니 아빠는 이방인이 되었다. 내가 은혜 받고 아빠를 더 넓게 품어주었어야 했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시간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 왜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그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섬기라고 교회에서는 말하지 않았을까? 가족보다 왜 교회가 우선이라고 했을까? 정말 한 영혼을 생각했다면 가족 중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더 헌신하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너희 가정이 다 믿지 않으니까 너가 더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만 강조하셨다. 항상 교회 봉사가 일순위이고 교회일꾼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기에 주말에 가족모임을 할 수가 없었다. 가족보다 항상 일순위에 교회가 있었고, 봉사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면 아빠가 교회로 돌아올 줄 알았다. 교회에서도 목사님도 그렇게 가르쳤다. 난 그게 옳은 거라 생각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면 가정이 다 평안해 질 줄 알았다. 이젠 봉사 많이 하고 교회에서 인정받으면 나머지는 다 잘된다는 목사님의 잘못된 설교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아빠를 잃고 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 몸이 부서져 라고 봉사하지도 않는다.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내 마음을 돌보고, 가족을 보살핀다.
내게 주신 소중한 가족들이 더 귀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 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고 있다. 마음은 아프지만 내게 남아있는 소를 더 이상 잃으면 안 되기에...

이 시대는 분별력 있는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맹목적인 신앙으로 무조건 목사님 말씀만 믿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올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그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교회는 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가? 무조건적인 헌신만을 강요하기 보다는 각 성도들의 삶을 돌보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출처 : 로고스서원
글쓴이 : 김기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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