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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story

연무참빛교회와 구세군

by 초코우유 ∽ blog 2022. 9. 30.

연무참빛교회 구세군 관련 아티클 -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2204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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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노회 교회 이야기 [4시찰] 연무참빛교회 이야기 - 1

김진수  2022.04.26

연무대와 연무지역을 선교하는 연무참빛교회 이야기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는 특별한 선교적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가 있다. 육군훈련소가 논산시 연무읍에 들어서면서 노회와 총회가 “훈련병과 면회객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연무 참빛교회”이다. 6.25 전쟁 이후, 육군은 제주도와 거제도 등,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훈련소들을 연무대 육군훈련소로 통합했다. 이에 국내 유일의 육군훈련소가 있는 연무읍은 주말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온 면회객들로 북적였고, 연 130만여 명에 달하는 방문자들은 가족끼리 만나서 시간을 보낼만한 시설을 찾지 못해 훈련소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강경교회를 시무하며 가까이에서 면회객들의 고충을 목격해온 최대위 목사는 훈련소 정문과 가까운 곳에 만남의 장소를 마련해주고 장거리 면회객에게는 숙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기장교회를 세워 이를 선교의 기회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1956년 3월 13일 충남노회 제 12회 정기회에 “연무대교회 창립”을 청원했다.


연무대교회로 첫출발한 이야기(1956년 ~ 1960년)

충남노회는 “연무대교회 창립” 청원의 건을 보류했다. 면회객 숙소가 있는 예배당 건물 건축에 드는 재정적 이유가 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규태 목사의 “충남노회사”(예루살렘, 서울, 1992. p580)에 따르면 “최대위 목사는 숙소와 예배처를 마련하기 위해 총회 전도부에 선교적 필요성을 여러 번 설명하고 강청하여 대지 400평, 60평 성전을 건축하여 ‘연무대교회’란 명칭으로 발족했다”고 한다. 총회적으로 선교적 필요성을 공감하여 큰 결정을 내렸고 재정까지 지원해준 것으로 보인다. 충남노회는 1957년 제 13회 정기회에서 그동안 보류되었던 연무대교회 개척안을 허락했다. 최대위 목사는 총회의 재정보조를 받아 연무읍 안심 7리 97번지에 60여 평의 흙벽돌 예배당을 건축했고 1959년 5월 6일, 노회로부터 “연무대교회”로 설립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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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과 면회객을 선교하기 위해 세워진 연무대교회

그러나 연무대교회가 훈련병들과 면회객 선교를 위해 활발하게 그 사역을 펼쳐나가기 시작할 무렵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쳐왔다. 1953년부터 시작된 “훈련병 면회”가 6년만인 1959년 6월, 경비과다 지출과 무질서한 상행위를 이유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연무대와 논산 일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면회객들이 일순간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연무대교회는 한순간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적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총회와 노회를 설득하여 1959년 연무대 지역에 훈련병과 그 가족들을 선교할 목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했던 최대위 목사는 그 이듬해인 1960년 교회를 사임하고 말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에 고심했던 시기(1960년 ~ 1979년)

최대위 목사의 사임 후 연무대교회는 근 20여 년 동안이나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 대상을 놓고 고심하며 씨름했던 시기로 보인다. 1961년 최대위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문희영 목사는 1965년까지 4년을 시무하고, 1969년 재부임하여 1년 동안 연무대교회를 섬겼다. 문 목사는 훈련소 선교를 위한 “연무대교회”에서 연무읍을 선교하는 “연무중앙교회”로 그 이름을 바꿨다. 교회의 선교 대상을 재정립하려고 고심한 흔적으로 보인다. 문 목사는 본래 구세군 출신으로 홍산면 홍양교회를 섬겼고, 후에 수암교회의 장로로 시무하기도 했다. 8.15해방 후에는 건국 운동으로, 6.25 전쟁 후에는 시국 수습으로 공을 세웠고 1950년대 교단 분열 와중에서 노회 안의 교회들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뒤늦게 뜻한 바가 있어 한남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 어려움에 처한 연무중앙교회를 섬겼다. 문 목사의 사임 후에는 연무대 육군훈련소에 재직 중인 우리 교단 군목들이 잠시 교역자가 공석중인 연무중앙교회를 섬기기도 했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는 이증구 군목이, 1967년에는 전주석 군목이 공석중인 연무중앙교회의 사역을 이어갔다. 그리고 1967년 6월 6일 초기의 충남노회를 세우는데 공헌한 임달호 목사가 부임하여 2년 동안,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문학영 목사가 5년간 교회를 섬겼다. 문학영 목사는 1974년, 교회 이름을 “연무중앙교회”에서 다시 “연무 화석교회”고 개명했다. 교회가 화석리 지역을 선교하고 섬기는 교회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영 목사는 연무 화석교회를 끝으로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고 노회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노회장 명의로 공로패를 전달했다. 1977년, 문학영 목사 후임으로 부임한 장동렬 전도사는 일 년 동안 교회를 섬겼다.


교회 성장의 문을 연 교회(1979년 ~ 1996년)

1978년 장동렬 전도사가 사임한 후, 시찰회는 1979년 3월 마명교회 이양구 장로를 연무 화석교회의 전도인으로 파송했고 농협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양구 장로는 그 후 직장을 사임하고 1980년 전임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전도사는 이선종 사모와 함께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랜 침체에 빠져있던 교회가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열게 해주시도록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고 그 기도에 중고등부 학생들과 청년들이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기도의 불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밤마다 부르짖는 찬송, 기도 소리에 주변 지역주민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이 전도사는 강대상 밑 지하를 파고 10여 평의 기도처를 만들어가며 기도의 열기를 이어갔다. 그 간절한 기도가 샤머니즘화 된 지역을 점차 복음화시키며 침체되었던 교회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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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참빛교회 부흥의 초석을 놓은 이양구 목사, 이선종 사모(좌),   부흥의 산실이 된 기도실(우)

충남노회 제36회(1980년) 정기회록 시찰보고에 따르면 “부흥 중 교회당을 수리하고 사택 25평(8백만 원)을 신축했으며 각종 성물을 준비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1983년 ~ 1985년에는 교육관을 신축하기도 했다. 아울러 연무 화석교회는 지역사회 선교를 위해 1991년 3월에는 한빛유치원(원장 이양구)을 개원했고 1991년 10월에는 유치원 건물 24평(조립식)을 신축했다.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선교의 문을 활짝 열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 2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해서 제5회의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지역사회의 취학 전 유아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1996년, 기존 건물들을 헐고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개교한 지 6년 만에 폐원했다. 당시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내린 아쉽지만 불가피한 결정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한 이 전도사는 목사안수 과정을 밟는 일에도 성실하게 준비하여 목양 사역에 뛰어든지 10년 만인 1989년 8월 목사 임직을 받아 연무 화석교회의 전도목사가 되었고, 연이어 교회를 섬길 신실한 청지기들을 세웠다. 1989년 11월에 라순이, 김태일 권사(1대), 1991년 2월 정옥순, 문정애, 전재식, 김순애 권사(2대), 1992년 6월 김수남, 김선희, 배숙희 권사(3대) 등을 임직했다. 또한 1994년 5월부터 연무 화석교에 출석하기 시작한 김영섭 장로를 협동 장로로 맞이했다. 김 장로는 인근의 마전리 나사렛 성결교회를 18년간 시무장로로 섬기다가 화석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신축과 연무 참빛교회로의 새 출발(1996년 ~ 2013년)

연무 화석교회 역사 중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예배당을 신축하고 장로 3인을 임직했던 시기였다. 1959년 5월에 처음으로 건축된 흙벽돌 예배당은 36년 세월을 거친 후 낡고 좁아서 더 이상 예배당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1995년, 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이에 앞서서 온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6개월간 특별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초, 임시 공동의회를 열고 예배당신축을 위한 건축헌금을 작정했다. 온 교인들이 동참하여 예상 금액을 뛰어넘는 헌금을 작정했고 마침내 1996년 9월 17일 대전 복음건설(주)과 공사계약을 맺고 건축 기공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예배당건축과 함께 새로운 선교적 비전을 담아 교회명을 “연무 참빛교회”로 변경하고 전승필 집사를 교육전도사(1대)로 임명하여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을 맡겼다.

1996년 완공된 연무참빛교회(좌), 부활절에 드린 전교인 예배

교회건축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어갔으나 완공을 앞두고 예기치 않은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공정율이 90%를 넘어섰을 때, 시공회사인 “대전 복음건설”이 또 다른 건축 현장에서 발생한 일이 발단이 되어 결국 부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제 막 화석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김영섭 협동장로가 교회 건축에 앞장섰고 건축 과정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방지하고자 시공회사 부도 시 조건 없이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백지 포기 각서”를 받고 계약을 채결함으로 공사 중 맞이한 위기 가운데도 교회는 재정적 어려움 없이 나머지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건평 30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5억 5천만 원의 건축재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 온 성도들의 헌신으로 부족함 없이 채워졌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출처: 한국기독교장로회대전노회
http://djprok.slim153.com/main/bbs/board.php?bo_table=c04&wr_id=33&sca=시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