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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story

구세군 선교사의 복음 전투와 한국인의 구세군 인식 / 박혜진

by 초코우유 ∽ blog 2023. 1. 28.

구세군 선교사의 복음 전투와 한국인의 구세군 인식, 박혜진, 20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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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화진역사강좌 II

주제: '죽으러 온 사람들' 그리고 굴곡의 역사

기간: 2014년 1월 9일(목)~2월 20일(목)

장소: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관

주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양화진문화원

 

날짜 주제 강사
제1강 1/9 죽으러 온 사람들: 한국에 묻힌 선교사 이야기 이덕주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제2강 1/16 개신교 선교사의 일상생활 조선혜 박사
(감신대)
제3강 1/23 성공회 선교사가 본 한국문화: 터너, 코프 방원일 박사
(서울대)
제4강 2/6 일제의 기독교 정책과 선교사의 대응 김승태 박사
(세계선교신학대학교)
제5강 2/13 전시의 구호활동: 기독교 외원단체와 선교사 김흥수 교수
(목원대)
제6강 2/20 구세군 선교사의 복음전투와 한국인의 구세군 인식:본윅, 리차드, 위더슨 박혜진 박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제6강. 구세군 선교사의 복음 전투와 한국인의 구세군 인식

 

박혜진(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상임연구원)

 

1.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

 

구세군은 1865년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버림받고 죄로 물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전투적인 정신, 그리고 악의 세력에 접근하여 공격을 가하는 군대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 준군대식 체제를 갖추고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구세군은 처음 출발부터 복음전도와 빈곤 및 사회악 타파라는 두가지 목적을 수행하고자 했다. 엄숙한 기성교회의 틀을 타파하고 거리에서는 손뼉치고 노래하며 북치고 나팔불며 전도하였다. 예배의식도 격식 없는 분위기로 바꾸어 기쁨의 노래, 악기연주, 박수치기, 개인간증, 통성기도, 그리고 회개로의 공개적인 초청 등 다양하다. 빈민구제, 금주단연(禁酒斷煙), 알콜중독자와 매춘부를 대상으로 한 갱생사업, 교도소와 병원 선교 등 사회적인 구제·구호사업이 구세군의 대표적인 사업 내용이다.

구세군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 조직이 군대적이라는 데 있다. 군대적 행정조직은 국제본영, 군국 또는 준군국, 지방 또는 지역, 영문으로 이어진다. 국제본영(영국 런던)에는 대장, 군국본영(각 나라)에는 사령관, 지방본영에는 지방장관, 영문에는 담임사관이 지휘자로서 통솔한다. 구세군에서 사용하는 용어, 의복, 사관들의 직급도 모두 군대식이다. 병사나 사관들에게는 직급상 상급자에게 절대복종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구세군은 사회악을 박멸하기 위한 전투적 복음 전도단이라 할 수 있다.

 

용어 구세군 용어 구세군
교인 병사 찬송가 군가
목회자 사관 헌금 탄약금
신학교 사관학교 부동산 구입 부동산 작전
입교 입대 선교지역 전장
교칙 군령 / 군률 선교시작 개전

 

구세군의 기본교리는 보수적이다. 정치나 국가에 대해 구세군은 원칙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 사회개혁이나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정부와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순응을 요구한다.

 

2. 구세군의 한국 선교

 

1) 구세군의 한국 개전

 

1907년 2월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엄 부드가 세계 순회 도중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집회에 참석했던 한국인 2명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908년 8월 호가드(Robert Hoggard, 許加斗) 정령 부부, 본윅(M. Bonwick, 班禹巨) 참령 부부, 밀톤(E. Milton) 기관 부부, 워드(Edith Ward) 기관이 개척대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구세군이 마침내 한국에 와서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즉시 통역을 통하여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정규집회를 위해서 눈에 띄는 거리에 집을 빌렸다. 왕의 일이 급하며, 한국인의 시급한 요구를 볼 때 시간을 지혜롭게 쓰기 위하여 사업시작 전에 그 백성의 말, 습관, 사고를 공부함을 제쳐놓는다고 하지만, 얼마동안 말씨, 한국인의 특성 및 관습을 배우고 지식의 힘과 성령의 힘으로 무장한다면 헌신적이요 자기희생적인 정령들, 정위들, 기관들 및 평신도로 된 위대한 종교적 군대가 측량할 수 없는 선한 일을 할 것으로 말하고 싶다” 1)

 

입국하자마자 호가드와 본윅은 이토히로부미 통감, 미쓰이 경무총감 등을 차례로 만나, 구세군이 정치나 파당에 가담하지 않고 영적 복리와 빈민들의 복지 증진에 힘쓸 것을 알리고 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1909년에는 「구세신문」을 창간하였고, 1910년 2월 구세군 사관학교를 개설했다. 1928년부터 자선냄비가 시작되었다.

 

2) 구세군의 선교 방법과 구세군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구세군 선교사들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교사들처럼 한국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준비기간을 두지 않고 바로 한국인 통역을 고용해 길거리에 나가 전도한 것이다. 이러한 전도방식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우려는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영어에 익숙치 못한 한국인 통역에 의해 구세군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이 정확히 전달되지 못했고, 그 결과 구세군 정체에 대해 한국인들은 오해하기도 했다.

 

“초기에 ‘통역관’의 한 사람으로 고용되었던 사람이 후에 고백하기를 자기는 영어로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노라 했다! 그는 개종자가 되어 사관학교에서 실제로 통역이 되었고 구세신문의 주요 기사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2)

 

그러나 나팔 불고 북을 쳐서 사람을 모으고 군복 차림의 외국인들이 전도하는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구세군 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한 지 불과 6주 만에 1백여 명의 교인이 생겨난 것은 구세군의 급속한 정착을 밝혀주는 사실이다.

군대 조직을 모방한 형태로 소개된 구세군은 다른 개신교 교파와는 다른 인식을 한국사회에 심어주었다. 특히 구세군이 한국에 소개될 당시 국내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개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함으로 의리를 삼는고로 이 한국인민이 도탄과 죄악 중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군대를 이곳에 파송하여 주둔할 새 구세군 중에 길을 여는 선봉대의 사관들이 영국에서 발정하여 만리창해를 기쁜 마음으로 건너와서 지난 수요일에 한성에 무사도착한지라.” 3)

 

구세군의 존재를 한국인민을 구하려고 파송된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다른 신문에서도 보인다. 교회 조직이 군대 조직으로 되어 있고 사용하는 명칭과 어휘가 모두 군대 용어였으며 교인들의 복장도 군복이었던 관계로, 구한국 부대가 1907년 8월에 강제 해산당한 후 그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단체로 인식된 것이다.

1909~1910년 주한 일본군 헌병대 기밀문서 속에 구세군 선교사들과 통역인 및 지방교인들의 활동 상황이 상세히 보고되었다. 구세군 모집 강연의 내용이 한국인 통역의 오류로 독립운동의 성격을 띤 것으로 오해된 것이다.

 

“나는 近時 한국의 정형에 대하여 자세히 탐구할 때 한국 동포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 구세군에 입교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우리 군에 입교하지 않으면 幾日이 못되어 몸을 의탁하고 갈 바를 몰라서 길에서 방황하는 비운을 당하고 따라서 미래사는 형용할 수 없는 데로 빠져갈 것이므로 동포 여러분이 신속히 우리 軍營에 입교하면 안전을 얻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압박을 면하고 따라서 국권도 회복하여 머지 않은 동안에 독립국민이 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제군이 급속히 우리 군에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云云.” 4)

 

개인적인 보호수단에서 끝나지 않고 국권회복과 독립국가 수립의 한 방편으로 구세군 입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방에서 구세군 모집을 하면서 독립국가 쟁취의 수단으로 구세군을 선전하였다는 보고는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모집된 구세군 교인들에게 군대 훈련을 시키고 있다거나,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군복과 정예 무기를 지급한다”고 설득하며 교인을 모집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1909년 초 구한국 진위대 병사 40여 명이 군대 해산 후 거취를 염려하여 호가드를 찾아가 집단 입교를 신청했다가 그의 설득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강원도에서 의병들을 모아 활동하던 김주민(金珠民)이 경성 구세군에 가입했고, 충청도 고인상(高寅相)은 ‘구세군 병사 사무소’라는 간판을 걸고 신도를 모집하면서 구세군에 가입하면 미국정부로부터 군복과 25원 내외의 월급을 받는다고 하였고, 일본과 미국의 평화가 깨지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5) 그들은 모두 구세군을 구한국 부대의 대치 기구로 보았던 것이다.

잘못된 통역뿐만 아니라, 준군대적인 모습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구세군은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더욱이 구세군의 뒤에는 영국이 있어 일본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는 의식도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3. 구세군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간의 갈등

 

1)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의 갈등

 

구세군이 민족운동 수단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은 통역인들의 오류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의 연설 내용을 충분히 해득할 수 없었던 통역인들은 연설 내용을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윤색해 통역하였고, 또한 한국어를 습득치 못한 선교사들도 잘못 통역된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채 상당 기간 한국인 통역인들에게 의존함으로써 구세군에 대한 오해는 한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알고 난 후 초기 통역인들의 그릇된 통역으로 인한 오해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당혹감을 느꼈다.

선교사들은 구세군이 정치적 집단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구세군 자체가 보수적 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된 데다가 당시 일본과 영국은 외교적으로 동맹 관계여서 영국을 배경으로 한 구세군 선교사들이 일본의 조선 정책을 비난하거나 방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나 ‘사회악 추방’ 등 순수 종교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구세군 선교사들은 구세군이 정치적 집단으로 오해받았던 것을 상당히 우려하였고, 어느 정도 한국말과 문화에 익숙해진 다음에 더 이상 그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구세군 본래의 복음적 성향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한국 교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고, 구세군의 실체를 알게 된 많은 교인들이 구세군을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10년 이후 구세군에서 양성된 사관이 1천명에 이르는데, 그중 6백 명 이상이 구세군을 떠났다고 한다. 1910년 이전에 활약하던 초기 구세군 주역들이 이후 구세군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 구세군을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역시 구세군 선교 초기인 1909년에는 구세군의 활동에 대해 배일적 내용이 있는지 자세히 감시하고 있다. 그러다 1910년이 지나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 일제는 더 이상 구세군 행적에 대해 감시하지 않았다.

 

2)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

 

1919년 3대 사령관 스티븐스(William Stevens, 신태빈) 참장은 인도에서 34년간 근무하다가 한국에 부임했는데, 그의 인도 사역은 한국인과의 관계를 어렵게 했다. 그는 영국인이 식민지인 인도인에게 대하는 태도로 임했다. 그는 후생학원 원사를 신축하고 변소를 짓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유는 인도에서는 변소가 없고 대변을 까마귀들이 다 치운다는 것이었다. 4대 사령관 팔스트라(Wiebe Palstra, 배일수, 1924-1926, 영국) 참장은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동양의 전통과 문화에 익숙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한국인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갑자기 자바로 전근 명령을 받자, 5대 사령관으로 토프트(James Toft, 두영서, 1926-1928, 영국)가 부임했다. 그는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했는데, 한국인을 그들과 같이 미개인 취급하며 인종차별을 하여 많은 사관들이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들과는 악수도 하지 않는 지도자로 기억되었다.

1926년 11월 제2대 구세군 만국사령관인 브람웰 부드(B. Booth)가 내한하였다. 이때 많은 수의 한국인 사관들과 병사들이 뜻을 모아 한국 구세군 내에 산적했던 비리와 불균형을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진정서를 작성하고 단체행동에 돌입했다. 진정서의 골자는 ‘서양인 선교사관과 한국인 사관의 차별대우 시정, 한국인 사관들의 지위 향상, 선교사관들의 비리 척결, 생활비의 개선’ 등이었다. 진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구세군도 지금은 18년의 역사를 가졌으니 조선인 사관 중 견실하고 정의로운 신앙을 가진 자에게 본영의 참모권을 부여할 것
2. 본영에서 매년 수입지출금 세목을 연말에는 회보로 발표하여 일반에게 알게 할 것
3. 본영과 사관학교와 지방영과 육아원 및 기타 사용하는 일체 문부를 영문 그대로만 두지 말고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영문 모르는 사관들도 우리 구세군 정책을 배우게 하여 장래 참모사관이 될 소망이 있게 할 것
4. 사관학교장이 못되면 보(補)는 필히 조선인 사관으로 임명케 하여 줄 것
5. 지방영에 補를 두려면 직권도 내려 매월 보고에 지방관과 같이 기명날인하여 보고케 하여 합의적으로 하게 할 것
6. 서양인 사관으로 조선인의 고유한 도덕 풍속 습관과 조선어를 잘 이해치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인 사관으로 지방관을 임명케 할 것
7. 조선인 사관 자녀 보조에 대하여, 서양인과 일본인 사관에 비하면 인종 및 민족 차별이 분명하니 일본인 사관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
8. 조선인 지방관 아래에 있는 서양인 담임사관의 월급보내는 것을 지방관에게 보내지 않고 직접 비밀히 보내는 것은 차별인 것이니 그도 철폐할 것
9. 이인배(李寅培) 정위와 오현상(吳賢相) 정위 월급에 대하여 차별이 있으니 그것도 철폐하고 전임비는 지방을 따라 실비로 지불하고 현금에서 정정할 것
10. 참모 허일(許日)의 만행이 심하였다는 것이 사관 병사 전부가 알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까지 확실하온즉 조선에서 떠나게 할 것
11. 참모 소서별(蘇西別)은 수해구제금을 횡령하였을 뿐 아니라 그 부인은 기관 안교철(安敎轍)을 구타하였으니 조선에서 떠나게 할 것
12. 참령 유우열(柳佑烈)은 본영 참모사관으로서 병사를 구타하였으므로 귀환케 할 것
13. 참모정위 안트(奈位)는 자기 책임에 대하여 제일 정직하고 견실한 사관이나 지금까지 승진되지 않았으므로 승격케 할 것
14. 사관학교 노오도(魯吳道)는 성품과 행동이 일반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위협과 감정을 주며 차별적 행동이 극심하여 조선인을 무시하니 교장의 지위에서 축출케 할 것
15. 현금 조선인 사관의 생활이 너무 구차하고 곤란하니 본급에서 5할을 인상케 할 것
16. 현 사령관 두영서(杜永瑞)는 언어행동이 사령관의 자격이 없으니 속히 처리하여 줄 것
17. 부관 옥거흠(沃居欽)은 애매히 조선인 사관을 무기(誣欺)하니 처리하여 줄 것
18. 無托無依한 사관의 부모에 대하여 동거 또는 봉양을 허하여 줄 것
19. 성결회에 동서양인을 물론하고 출석케 할 것
20. 특별자격자에 한하여 계급과 지위를 속히 승격시켜 줄 것 6)

 

11월 4일 도착한 브람웰이 조선총독부의 환영 하에 국빈대우로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푸는 동안 한국인 사관들이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11월 6일 전국 구세군 병사집회 시에 진정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서양인 사관들이 한국인 사관들을 구타하였다. 이후 한국인 사관들은 요구의 관철과 대장 면담, 서양인 사관들의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브람웰 대장은 한국 일정을 축소하고 11일 급히 서울을 떠났다. 이 일로 인해 70여 명의 한국인 사관들이 구세군에서 쫓겨났다. 서양인 사관과 한국인 사관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지만, 현실적 기반이 약한 한국인 사관들은 경제적 타격이 컸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구세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1940년까지 한국인은 서기관에 임명되지 않았고, 영문사관 및 군우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5개 영문과 13개 분영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우개선, 교육의 강화, 사관잡지의 발행, 사관 보습교육제가 실시되었다. 토프트 사령관은 1928년 6월 15일 별세하였다.

 

4. 일제의 탄압과 구세군의 변화

 

1936년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교회와 학교에까지 강요되었다. 1938년 4월 사관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황종률 중좌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고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11일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5월에 사관학생들의 신사참배 불참결의 회의록이 작성되었고, 6월 사관학생들이 구류 처분을 받았다.

1940년 이전까지 한국 구세군은 영국의 만국본영과 직접 연결되어 재정적인 원조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고, 행정관리는 서양선교사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이 적대관계가 되자 모든 연결고리가 차단되었다. 총독부 당국은 구세군 영국 본영과의 의존관계를 청산하고 교파의 군사적 색채를 없애도록 여러 차례 압력을 가해왔다. 1940년 9월 일본 구세군이 구세단으로 바뀌었고, 한국도 10월 30일 ‘조선 구세단’으로 이름을 강제로 바꾸고 만국본영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토마스 윌슨(Wilson, 위일선) 사령관은 사임한 후 후임으로 한국인 사관 황종률 대좌보를 임명하고, 일본인 사카모토라이지 소좌가 총무서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12월 황종률은 총무부장이 되고 사카모토가 구세단 단장이 되었다.

구세군의 명칭뿐만 아니라 조직체제까지 모두 해산되고, 계급과 복장도 모두 바뀌었다. 구세단으로 바뀐 지 3년 만인 1943년 11월에 다시 교회제로 개편되어 구세교회가 되었다가, 1945년 7월 19일 출범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5. 양화진에 묻힌 구세군 선교사 및 가족들

 

양화진에는 구세군 사관과 자녀들을 합해 모두 11명이 안장되어오다, 2000년 6월부터 구세군 순교성지기념사업회에서 묘역을 보수하고 다른 곳에 묻혀있던 에이커홈, 콜러 사관과 스미스 사관의 딸 도린 등 3명을 이장하여 현재 14명이 안장되어 있다.

 

사망연월일 이름(한국명) 나이 성별 비고 / 국가 양화진
1912.4.29 Jenny
Sofia Frick
25 1912년 내한, 급성뇌염으로 사망 / 스웨덴 A-12
1913.5.23 Magda
Kohler
(고월라)
26 1912년 내한, 대구에서 장티푸스로 사망 / 스웨덴 F-44
1920.1.19. Douglas
Sylvester
1 1910년 내한한 Charles E. Sylvester(설보덕)의 아들 / 영국 D-21
1920.1.28. Gordon
Sylvester
5 1910년 내한한 C. E. Sylvester 아들 D-22
1920.2.5. Williams
Richards
(이도식)
42 1918년 내한, 천연두로 사망 / 영국 D-24
1920.3.15. Erland
Akerholm
(옥거흠)
40 1914년 내한, 장티푸스로 사망 / 스웨덴 D-20
1922.1.5 Florence
R. Hill
29 1909년 내한, A. W. Hill과 결혼. / 영국 D-18,19
1923.4.18 Lincoln
French
25 1916년 내한한 구세군 George French(부래지) 사령관(1919년 이임) 아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난 뒤에도 남아 어학선생을 하다가 폐렴으로 사망, 스티븐스(신태빈) 사령관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주관하고 양화진에 안장 / 영국 D-11
1927.9.6 Cathie
Bonwick
13 1908년 내한한 Gerald W. Bonwick의 딸/호주 F-32
1928.6.15 James
Toft
(두영서)
63 1926년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 / 영국 D-17
1928.6 Doreen
Smith
4 1925년 내한한 W. H. Smith 사관의 딸 / 영국 D-23
1930 Norman
Fox
2 1929년 11월 내한한 A. Fox 아들 / 호주 F-45
1934.4.8 Ellen
P. Hobbs
52 1910년 내한(Thomas Hobbs 부인) D-15
1956.5.10 Colonel
Mary
Widdowson
58 1926년 내한. 1953년 재내한 / 영국 A-31

 

 

1) 지니 S. 프릭(Jenny Sofia Frick, 1886.9.16-1912.4.29)

 

스웨덴 출신 구세군 선교사이다. 1911년 스웨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내한하였다. 프릭 사관과 같이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는 5명으로, 영국 출신의 Annie Baty, Sidney Manton, William Naylor, 스웨덴 출신의 Magda Kohler, Verna Ollsson이다. 이전에는 언어를 배우기 전에 선교현장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은 선교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1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하였다. 프릭 사관 일행이 내한함으로써 외국인 구세군은 총 25명이 되었고, 이제 여러 부문으로 구세군의 선교사업이 확장되게 되었다.7) 프릭은 4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서울에서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눠주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프릭은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에 걸려 4월 29일 별세하였다. 그녀는 사관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외국 여자이지만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내 몸이 다하도록 주의 일에 종사하겠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초대 사령관 호가드가 장례식을 인도하였고 양화진 묘역에 묻혔다. 한국에 온 구세군 선교사로서 최초로 순직하였다. 한국에서는 오직 4개월 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2) 마그다 콜러(Magda Kohler, 1886-1913.5.23.)

 

1911년 스웨덴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으로 임관된 후, 1912년 독신으로 스웨덴 선교사관 제1진으로 내한하여, 호가드 사령관 비서로 전도여행 등을 도왔다.

한국어를 배운 후, 시골로 다니면서 한국인을 좀 더 많이 접촉하려고 노력하며 구령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호가드 사령관 부인과 함께 경북 의성군 원당리에 가서 순회를 마치고 자원하여 원당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장티푸스 때문에 숨진 사람들을 수습해 주는 등 원당지역에 많은 감화를 끼쳐, 그녀의 한국 이름을 모방하여 이름을 짓는 일도 있었다.

동료 사관들은 콜러 사관을 항상 강인하고 힘 있게 활동하는 여성으로 인식하였다. 콜러 사관은 모든 사역을 하고 난 후에 열정적으로 언어 공부를 하였고 그 결과 매우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습득하여 언어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녀는 영적으로 충만하였고 매사를 긍정적이고 밝게 바라보았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와 주님과의 교제에 힘썼으며, 한국인들을 매우 사랑했다. 연례회의가 열렸을 때 “나는 주를 위해 고난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고난으로 나아가게 하소서”라고 증언했다.

라일리(Riley) 사관이 마지막으로 콜러 사관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는 기쁘게 갑니다. 나는 이 나라의 어두움 속에 있던 여성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고, 나는 여기서 주님의 은총을 느낍니다.... 모든 사역자들과 한국인들에게 나의 사랑을 전해주십시오. .... 그 어떤 것도 나를 나의 작은 집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전해주십시오”라고 했다. 편지에서도 “나는 지금 아주 행복합니다. 건강도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봐야 할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1년 전 프릭 사관이 보다 나은 곳으로 갔지요. 그녀는 지금 아주 행복할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한국인을 사랑했던 콜러 사관은 매우 피곤하고 식욕이 없어져 대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8) 1912년 같이 내한한 프릭 사관이 4개월 만에 별세한 데 이어, 콜러 사관도 1913년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대구 동산병원에 옮겨져 치료받다가 별세했다. 당시 대구동산병원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2000년 9월 27일 순교성지 기념사업회의 주선으로 양화진에 이장되었다.

 

3) 윌리엄 리차드(Williams Richards, 이도식, 1878-1920.2.5)

 

1878년 런던 출생, 어려서부터 가두 전도에 나섰고, 12세 때 ‘꼬마음악단’ 단원이었다. 런던 구세군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덴마크와 본국의 만국본영에서 일하였고, 1909년 결혼,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에 파송되었다.

한국에는 1918(42세)년 6월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파송되었다. 특히 이 해는 구세군 한국개전 10주년이 되는 해였으므로, 1918년 10월 10일부터 17일까지 일주일간 국내외 사관과 선교사가 참석해 성대한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리차드 서기장관은 한국 사관을 양성하고, 남자 육아원을 개원했다. 당시 한국 사령관은 조지 프렌치(George French, 부래지) 참장이었는데, 그가 1919년 전근되자, 리차드 부령이 사령관 대리를 했다. 그러나 1919년 말 한국에 천연두가 퍼져 1920년 초 서울육아원에는 물론 실베스터(Charles Sylvester, 설보덕) 유년부 서기관 집에도 전염되었다. 1920년 1월 19일 실베스터의 9개월 된 막내 더글라스(Douglas)가 천연두로 사망하였고, 1월 28일 장남인 4살된 고든(Gordon)이 사망했다. 이들의 장례를 리차드 부령이 인도했고 양화진까지 눈길을 걸어 외국인묘지에 안장시켰다. 그러나 2개월 후 리차드 부령도 천연두에 전염되어 별세하였다.

리차드 부령은 매일 심방과 기도를 하면서, 구세군 육아원에 천연두가 퍼지는 것을 막다가 전염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2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취미는 다양하여 각종 스포츠, 권투, 펜싱, 서양씨름 등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지만 “가장 즐거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그의 나라의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 지혜있는 자는 영혼을 구한다”고 하였으며, 강직한 구세군인이었다.

리차드 부령의 부인도 성탄절 이후로 폐렴을 얻어 매우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남편의 장례식도, 묘지 매장식도 참석할 수 없었다. 2월 8일 주일에 추모예배가 열렸는데 이날은 리차드 부령의 11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리차드의 부인은 유복자를 잉태한 몸으로, 네 자녀와 함께 장례식 4일 후 캐나다로 출국했다. 1922년 9월 캐나다 구세군 동부지방영에서 리차드 부령의 부친인 캐나다 사령관의 주선으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보낸 기부금으로 기념관을 건립한 것이 경성 제2영문, 현재 구세군 아현영문이다.

 

4) 에이커홈(Erland Akerholm, 옥거흠, 1888.3.13.-1920.3.15.)

 

1914년 3월 9일 선교사관으로 내한했고, 1916년 6월 나틸다 스웨덴 사관과 서울에서 결혼했다. 개성지방관에 임명되고 1920년 충북 영동지방관으로 전근되었다. 그는 3월 초부터 질병과 싸웠는데, 일본인 의사는 발열티푸스라고 진단했다. 스틸러 박사(Dr. Stiler)와 파우모 참모정위가 경성에서 방문하여 조처를 취했지만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1920년 3월 15일 별세하였다. 원인은 장티푸스였다. 혼수상태 속에서도 그는 자주 스웨덴어와 영어와 조선어로 기도를 드렸다. 파우모 참모정위의 인도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가 마지막을 보낸 지방영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2000년 9월 27일 순교성지 기념사업회의 주선으로 양화진에 이장되었다. 스웨덴 사관으로는 3번째 순직이다. 혼자 남게 된 부인은 함남 지방관으로 있다가 사관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본영 사관 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원산 선교사 휴양관장, 서울 여자관장 등을 역임했다. 계속 사관학교, 여성사업부, 사회사업부를 돕다가, 1940년 12월 8일 일제에 의해 강제출국 당했다. 사재를 출연해 영동병원 설립에 기여했다.

 

5) 플로렌스 힐(Florence Riley Hill, 1891-1922.1.5.)

 

영국 출생. 1909년 내한해 호가드 사령관의 비서로 일했고, 1910년 충청지방장관으로 임명된 선교사관 힐(Alfred William Hill, 허일) 참모정위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충청지방관으로 충청지역의 개척사업과 선교와 봉사에 힘썼다. 1917년 5월 남편은 제3대 사관학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녀는 1917년 10월 처음으로 여자사관학생 교육을 시작했다. 순직한 선교사관들을 기리는 글을 남겼고,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다년간 빈혈증을 앓아온 플로렌스 힐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22년 1월 5일 평동 사관학교 내의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1913년 5월 별세한 마그다 콜러를 기리는 글을 썼던 라일리(Riley) 사관이 바로 플로렌스 힐이다. 그녀는 자기의 몸과 같이 한국인을 사랑했다. 스티븐스(William Stevens, 신태빈) 사령관이 장례를 인도했다. 장례식 날은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녀의 묘 옆에는 아들(Wilfred O. Hill)로 추정되는 이가 묻혀 있다.

남편 힐은 1910년 9월 내한, 1911년 11월 충청지방관으로서 충청도지역 개척사업을 지휘했다. 1917년 5월에는 구세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어 사관 양성에 주력하였고, 1918년 로드(H.A. Lord)와 블라디보스토크에 파송되어 한국인에게 선교하였다. 1922년 사관학교 회계, 1923년 육아원 원장을 맡았다. 부인 사후 1923년 엣웨이와 재혼하였다. 1925년 한국순회선교단을 인솔하여, 미국, 캐나다를 순회하며 모금하여 서울 정동에 구세군사관학교를 신축하였다. 1927년 9월 서인도의 바바드스 섬으로 전임되어 출국하였다.

 

6) 본윅(Gerald W. Bonwick, 班禹巨, 반우거)

 

본윅은 호주 출신으로 3세 때 영국으로 이주해 고등학교 교장인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은 후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1908년 10월 구세군 개전 때 내한하여 교회 행정을 담당했다.

1909.7.1 「구세신문」 창간에 노력하였고, 1910년 2월 15일 성경대학이라는 사관 양성소를 개설하고, 본윅이 주관하여 황종률 등 20명을 양성하였고, 10월에 각기 임관 후 파송했다.

본윅은 1910년에는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예수교서회)의 총무로 선출되어 수년간 서적을 발간했고, 또 교회 연합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는 등 한국기독교 문서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본윅 부인은 구세군 사업을 계속 도왔다. 양화진에는 본윅의 딸인 Cathie Bonwick이 안장되어 있다.

 

7)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두영서, 1865.7.4.-1928.6.15.)

 

영국 웰링턴 영문 출신으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미국 등지에서 사역했다. 인도 북부 지역에서 사령관으로 봉직하다 1926년 8월 16일 한국 군국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농아 사업에 능한 그는 천연동 농아원을 도왔다.

1926년 11월 4일 브람웰 부드 대장이 내한했을 때 허곤, 윤수만, 최봉희, 권용준 등이 그동안 한국 사관의 대우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로 대장에게 보내는 20개항의 개선책으로 인해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였다. 토프트 사령관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며 구세군을 손상시킨 것과 20여명의 사관들이 면직되고 사관학생의 휴학조치 되는 등의 충격으로 병을 얻었다. 뇌일혈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1928년 6월 15일 64세로 별세하였다. 서대문 제1본영에서 장례식을 집례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그의 재임 중 정동에 구세군사관학교와 대구영문, 해주영문이 신축되었다.

 

8) 엘렌 홉스(Beatrige Ellen Puch Hobbs, 1880.8.24.-1934.4.8.)

 

남편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s, 허엽).

만국사관학교를 남편과 함께 졸업하고 구세군 사관에 임명되어 1910년 9월 16일 내한하였다. 남편 홉스는 1911년 한국본영 근무자로 발령되었고 개성지방관으로 사역하였다. 1913년에는 대영성서공회 부총무로 선임되어 성서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양화진외인요지의 관리역을 역임하였다. 홉스는 부인 별세 이듬해인 1935년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E. Vanfleet)와 결혼했고, 1937년 대영성서공회 총무가 되었다.

엘렌 홉스는 1934년 당시 여자절제회, 동물학대방지협회 등을 통한 사회사업과 진명여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1934년 4월 8일 별세하였다.

 

9) 마리 위더슨(Mary Colonel Widdowson, 1898.4.4.-1956.5.10.)

 

남편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위도선).

위더스 부인은 스코틀랜드에서 출생, 1914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고, 1924년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에서 살았으며, 사관학교를 거쳐 부교(副敎)가 되었다. 한국으로 떠나는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약혼한 채, 남편은 한국에서 후생학원장으로 부인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다, 1926년 남편이 있는 한국에 도착해 결혼하였다.

서울 교외 고아원에서 7년간 고아들과 생활. 거리에서 데려온 병에 걸린 고아로 인해 남편이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부인도 전염된 가운데서도 고아들의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걱정했다고 한다. 부부가 휴가차 영국에 돌아갔다가, 1934년 케냐 군국 고아원 원장과 총무서기관 부인으로 임명되어 7년간 남아프리카 케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하였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1월 29일 다시 내한, 부산에서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재건하고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으로서 <구세공보>, <구세군가> 등을 복간하는 등 기독교 서적을 출간하였고, 세계 각국의 구세군 단체에서 각종 구호물품, 식료품, 의약품을 보내주어 구제사업과 사회사업에 힘썼다.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를 맡았다.

1956년 5월 10일 위더슨 부인이 위암에 걸려 별세하였다. 그녀는 투병 중에도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 거리에서 전도지 뿌리며 동료들을 격려하였다. 유언으로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하며, 한국 땅에 묻혔다. 남편 크리스 위도슨은 1957년 인도네시아 사령관으로 전임하여 기아 구제에 헌신하였다.

 

각주

 

1) “Editorial” The Korea Mission Field Vol.4, No.10(1908.10), 153.

2) A. Wiggins, The History of the Salvation Army, Vol.4(1904-1914) (International Headquarter of The Salvation Army, London), pp.2-3; 이덕주, “초기 한국 구세군 교인들의 민족의식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사연구』 26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9.6), 6 재인용.

3) “구셰대군츌쥬”,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18일.

4) 『日本公使館 記錄』 憲機 제1338호(1909. 6. 30).

5) “第六師團參謀長 佐藤兼毅가 內部警務局長 松井茂에게 보낸 通報(1909.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의병편Ⅶ)』;“江景地方에서의 救世軍活動과 排日的 行動에 관한 報告” 高秘收 第1929호(1909. 4. 15), 『統監府文書』 8권, 11.

6)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

7) John F. Crispin, “The Salvation Army” The Korea Mission Field Vol.8, No.4(1912.4), 122-123.

8) Florence Riley, “Memorial Tribute to Captain Magda Kohler” The Korea Mission Field Vol.9, No.7(1913.7), 187-19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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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순교성지기념사업회 엮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한국 구세군의 순직선교사와 순교자들』(구세군대한본영, 2001)

황선엽, “한국기독교사자료연구-「구세신문」”, 『한국기독교사연구』 1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8.2)

이덕주, “초기 한국 구세군 교인들의 민족의식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사연구』 26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9.6)

서정민, “구세군 분규사건(1926년)”, 『한국기독교사연구』 26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9.6)

 

구세군 선교사의 복음 전투: 본윅, 리차드, 위더슨 (양화진문화원 역사강좌2, 박혜진, 2014)

사진출처: 양회진문화원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yanghwajinculture/posts/485390398239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