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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사회학

기독교 신앙이 사회학을 만날 때(정재영)

by 초코우유 ∽ blog 2016. 6. 6.

기독교 신앙이 사회학을 만날 때



정재영


요즘 주위에서 신학자나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교회를 이해하는 데 사회학의 관점이 많은 도움을 준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사회학을, 그것도 종교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들으면 사회학을 공부한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격세지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전에 다녔던 교회의 연세 많으신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사회학은 사탄의 학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신학자 또는 목회자의 평가가 왜 이렇게 크게 바뀌게 되었을까?


사회학은 사탄의 학문?

사회학을 사탄의 학문이라고 하신 목사님 말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추측해 보건대 그것은 아마도 사회학이 하나의 과학으로서 객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로 여겨진다. 잘 아는 대로 과학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엄정한 가치중립의 관점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기본 요건이 된다. 가치중립의 태도란 연구자의 가치 판단 곧 연구자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객관성은 자기 주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실을 기술하거나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보기를 들어서 70~80년대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자. 신앙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학의 관점은 당시 한국 사회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로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경험하던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설명을 시도한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에 고향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타향살이하던 사람들에게 교회가 일종의 대체 가족 또는 대체 공동체를 제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당시에 한 사회학자는 “교인 증가수와 술 담배 소비량이 정확하게 비례한다.”는 분석을 내놓아 많은 목회자로부터 불경스럽다며 항의를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설명은 타향살이를 하며 직업 전선에서 고생을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술 담배로 위안을 삼고, 또 어떤 사람은 종교 활동으로 위안을 삼은 것이기 때문에 두 행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관점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기독교 신앙과 사회학의 공통점

기독교 신앙과 사회학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두 영역 모두 비판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학은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당연시하기보다는 그것이 과연 당연한 또는 자연스러운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일종의 ‘낯설게 보기’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모든 과학에서 공통 되는 태도이다. 뉴튼이 아래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그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의문을 가져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사회학은 사회적 사실이나 기존 질서의 정당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또한 사회학의 정신적 모태가 되고 유럽에서 시민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사회계약설의 정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 또한 성경이라고 하는 절대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절대 기준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어떤 것이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가하는 비판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어떠한 세상 문화나 정치권력이나 심지어는 현실 교회에 대해서조차 그것이 성경의 뜻에 맞는지 질문할 수 있고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개중에는 더러 비판 성향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비판 성향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인간 사회는 불안정 속에 안정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과 갈등이 항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 요소를 무조건 덮어두기보다는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화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조건을 찾는 것이 불완전한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대안도 찾을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이 주는 도움

사회학의 관점에서 교회와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모호한 언설로 표현되던 부분이 보다 명확해지고 우리 자신과 교회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교회는 영적인 영역이고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 역시 여러 사회단체 중의 하나이고 그런 점에서 일반 사회단체와 공통되는 특성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며 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으므로 가능한대로 과학의 방법을 활용하여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또한 어떠한 과학의 방법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 영역은 사회과학이 건드릴 수 없는 신학의 영역이 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사회학은 객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학 관점의 설명에 기대다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약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현상을 객관성 있게 설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되거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에만 의지하지 않고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조차도 신앙에 대해서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또 그러한 사람이 이른바 ‘신앙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신앙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덮어놓고’ 믿기보다는 이성으로 따지며 ‘깊이 상고’하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코 신앙에 반(反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학의 관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 진리를 믿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 쉬우며 배타성이 강하여 심지어는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며 사회와 소통할 가능성을 없애버려 교회를 게토(ghetto)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있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강요할 것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해야 우리도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 사회학을 만날 때 우리의 신앙은 보다 폭넓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출처 : 새가정(새가정사, 통권55권 600호 2008.5), 6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