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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상징(부제 : 예전 가구의 신학적인 이해) 서평

by 초코우유 ∽ blog 2016. 5. 7.

거룩한 상징(부제 : 예전 가구의 신학적인 이해) 서평


목차

제1장 예전 가구의 신학적인 이해 (박종환, 이승진)

제2장 성구에 대한 의식 조사(정재영)

제3장 현대인의 종교성과 성구(조성돈)

제4장 성례와 성구의 역사(이범성)

제5장 성만찬 신학과 성구(김용성)

제6장 거룩한 사물, 행위, 그리고 예배(박종환)

제7장 설교신학과 설교환경의 상관관계(이승진)

제8장 예배에서 예전 가구가 회중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디자인(정시춘)

제9장 좌담 - 한국교회 예전 가구의 현재와 미래


서평

1, 2, 3장

  기독교 예배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는 상징성을 가진 거룩한 사물들 곧, 성경, 세례수, 세례반, 빵, 포도주, 성찬대, 초, 기름, 예복, 스톨, 의자, 설교단, 제단, 십자가, 배너, 음향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단순히 삶의 도구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룩한 사물이며, 이들 안에는 기독교 이천년 역사 가운데 간직되어온 독특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분을 만난 공동체와 개인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거룩한 사물들이 개신교 예배 안에서 그 의미를 잃어감에 따라 예배는 사물들을 통해 경험되어진 하나님의 신비와 그 역동적 생명도 함께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얼마 전 방문하였던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에서 보았던 많은 (성화를 포함한) 성물들을 보면서, 우리네 개신교 내에서, 우리에게 없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것들을 비판하고 깎아내림으로 우리의 정통성을 입증하려하는 측면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방정교회와 로만카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인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성화(聖畵)와 성인(聖人)의 개념들은 그들의 신앙 전통에 대해 무지한, 그러나 용감하기만 한 기독교인-대부분은 깊은 이해를 갖지 못한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에게서 십계명의 제일, 제이계명에서 말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는 것에 위배된다고 평가되어져 왔다. 그러나 정작 정교회 측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그것이 엄청난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안 저 깊은 속에서 사죄와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들이 밀려오게 된 것은 경험에서 오는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정재영 교수는 제2장 ‘성구에 대한 의식 조사’에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국 개신교의 성구에 대한 의식 정도를 분석하였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단, 설교단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내용은 어떠한가? 또, 실제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서 성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어떠한가? 그저 ‘성장지상주의’ 홀릭(Holic)에 빠진 나머지, 마치 다단계를 연상시키는 기업형 경영이 팽배해져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된다. 

  한국인은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다. 조성돈 교수는 한국인의 종교성에 대해 정체성이 약하며, 한국사회의 특징인 가족주의가 종교생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위치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다원주의 및 문화적 상대주의 태도 등이 융통성 있는 천주교 이미지와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한다.

  많은 종교성을 가진 한국인,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한국개신교. 그동안 멀리해온 거룩한 물품(성물, 성구), 거룩한 상징들, 종교성을 가득 머금은 이것들을 이제는 다시 교회(Protestant church)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야 할 때이다.


4, 5, 6장

  개신교는 가톨릭으로부터 이의를 제기하며(protestant) 떨어져 나온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이다. 그러하기에 성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톨릭의 반대적 위치에 섰던 개신교는 가톨릭 전통에서 중시되던 여러 성례와 성구들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의 신비적이고 제의적인 구조물들을 완전하게 없애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교회이기를 원했고, 지상 위의 존재이기를 원했으며, 가시적이기를 원했고, 육화된 구원의 기관이 되기를 원했으며, 또 그렇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전체 예배가 철처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수난신학적으로 이해되었다. 예배는 무엇보다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특징들을 나타냈는데, 그러므로 옛 성찬식 제의는 물러가고 미사는 실천에 있어서 단지 희생제사로 취급되었다. 개신교 예배에서 희생적 성격은 예전에서 사라져야 했고,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그 의미가 주목되었다. 멜랑히톤은 성례전의 합법적 특성은 단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만 있는 것이지, 사람이 주체적으로 다시금 속죄를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칼빈은 성례전이 신앙을 강화하고 많게 해주는 역할만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츠빙글리는 성례전은 적고 적당하고 단순한 예식으로 충분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제나 일치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자체를 대신하는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성만찬의 이미지를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대, 성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식사이다. 예배의 중심이 되는 성만찬 신삭에서 볼 때, 성만찬 의식이 끝난 뒤 성찬상을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리는 것은 문제를 제기할 만한 일이다. 성만찬의 타락은 식사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시작하며, 성만찬의 상징성만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경우에 나타난다. 성만찬은 본래 공동식사였으며,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경험하게 될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셨다. 성만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종말론적 축제로서 기쁨, 감사, 희망을 누릴 수 있는 주일 공동예배의 근간이다.

  한국 기독교 내에서 오래전부터 ‘부흥하는 교회’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부흥의 척도를 양적 성장으로 보는 견해도 팽배해져 있다. 분명한 것은, 영적 부흥은 반드시 양적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분명히 성도-태생이 그 교회출신이든, 이웃 교회로부터 수평이동을 하였든지 간에-로 하여금 그 교회에 머무르게 하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세상문화의 변화에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미명 아래, 일명 ‘열린 예배’의 이름으로 많은 부분에 있어 파격적인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나 진정 성도들이 원하는, 교회(기독교인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와 예배에서 얻고자 갈망하는 무엇인가?

  몇 해 전,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미실세주와 선덕여왕이 나눈 대화가 기억이 난다. 선덕여왕은 과학적 사실을 널리 알리려 첨성대를 만들었고, 백성들은 도리어 첨성대를 제단 삼아 제사를 올리는 데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고민하는 선덕여왕에게 미실세주가 한 말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의지할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상과의 접촉(contact)을 위해 교회의 ‘탈 전통주의’를 추구하고 하지만, ‘거룩한 상징’으로서의 예전과 예전 가구들, 성찬식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로서의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접촉점(a point of contact)이 될 여지가 충분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실행되어져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방교회의 전통 아래 예전에 있어 신비성을 제거하려 노력해왔지만, ‘빈야드적 신비함’이 가득한 선교단체의 예배와 ‘성령사역’이 거행되는 교회의 예배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1년 과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