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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서적 서평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

by 초코우유 ∽ blog 2011. 4. 4.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

 

 

1829년 4월 10일 영국 노팅험 시내의 한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윌리엄 부스, 그의 아버지는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돈벌기에 바빴으나 그 집안은 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집이였다. 늘 야단만 치시는 아버지와 내성적인 어머니, 세 누이와 윌리엄까지 여섯 식구였다. 가난에 자존심이 꺾인 식구들은 언제나 이웃들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은 가족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으나 부귀공명에 대한 진념으로 윌리엄을 신사의 자녀들이 다니는 소위 일류학교에 보내고 잃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 다시 사업에 투자했으나 윌리엄이 13세 때 사업은 결정적으로 파산하였으며 윌리엄은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돈이 너무 아쉬웠던 아버지는 윌리엄을 6년 기한으로 전당포에 보내어 고용살이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집안은 종교라는 것을 모르는 집안이었다. 윌리엄은 근처 영공 성공회의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되었으나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윌리엄의 사촌은 구두 수리공이었는데 그는 매우 친절하였으며 제대로 기독교인답게 살았다. 윌리엄 역시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사촌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고용살이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아버지는 중병으로 아주 드러눕게 되었을 때 사촌으로부터 신앙적인 도움을 많이 받아 임종 앞에 두고 자기가 한평생 얼마나 과오가 많고 허송세월을 했는가를 깨닫게 되고 이를 참회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아뢰며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은 생전 처음으로 대하는 죽음 앞에 무척 두려웠으며 이때에 그의 내면에 무엇인가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진 것, 그러나 그의 생명은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떻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윌리엄은 그의 사촌이 다니는 감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성경공부 반에도 가입하였다.

 

윌리엄은 가난하고 비참하며 죄악을 행한 대부분 비참한 환경의 결과라 할 수 있었으나 이에 대해 민감한 윌리엄의 마음에 얼마나 뼈저리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윌리엄은 뚜렷한 삶의 목적을 세웠는데, 첫째는 돈을 벌어 어머니와 누이들이 편안히 살도록 해드리자, 둘째 정치적 혁명가, 특히 웅변가가 되자, 셋째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자는 것 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 세 번째 생각이 가장 그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감리교회에서 들은 우렁차고 올바른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배운 교훈은 윌리엄으로 하여금 신앙에 관하여 높은 표준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부스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장애와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과거의 옳지 못한 행실 때문에 천국문은 나를 향해 굳게 닫혀 있는 듯 느껴져서 내 죄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곧잘 물건을 팔아 이익을 얻고도 아주 친절히 그냥 주는 척 했다... 나는 아직도 교회 안의 한 장소를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 앉아 기도하던 중 드디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하여 친구를 만나 내 잘못을 고하고 그에게 은제 필통을 돌려주었다 그 순간 무거운 죄 짐은 없어지고 내 마음에 평안이 깃들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나의 하나님과 이 세대를 위하여 일하러 갈 것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내 속에 새사람이 나를 죄에서 끌어내 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완전히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나의 새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윌리엄은 생활에 큰 축복이 된 것은 그와 동년배의 경건한 젊은이들과 친교를 갖게 된 일이었다. 얼마 후 그는 열병이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었으며 약해진 몸으로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때에 윌 샌솜도 폐결핵으로 몹시 허약하여 친구를 만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병상에 있는 부스에게 보낸 메시지는 “가로전도를 시작했으니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서 속히 건강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윌리엄은 병마와 싸워 이겨냈고 결국 친구와 함께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 부스는 매우 소심하여 친구를 도와 아멘 정도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어떤 부흥사가 청년 부스를 보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인데 공연히 겁을 먹는 것은 하나의 이기주의로서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이 말을 들은 부스는 곧 명심하여 전도를 실행하게 되었고 얼마 후 그는 한 작은 전도대의 인도자가 되었다.

 

6년 기한의 고용살이를 마치고 19세 부스는 새 직업을 찾아 나섰다. 부스가 신앙 생활함에 있어 가족들은 반대하였으나 점차적으로 누이들과 어머니까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행복하고 안락한 가정으로 변했다. 그런 그에게도 큰 시련이 있었으니, 12개월 동안 직업을 계속 구하러 다녔으나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 후에 구세군의 사관들이 수만 명의 무직자를 돌봐주게 된 것 즉 그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게 했던 것은 절망 중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창립자의 동정심, 곧 경험의 산물이었다. 부스 누나는 결혼하여 런던에 살고 있었다. 부스도 런던에 가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마차에 몸을 싣고 먼 여행을 떠났다. 세계의 최대 도시 런던에서 명예와 재산을 얻고자 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정도 발판을 마련하고 성공하기까지 고독과 질고, 굶주림의 시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런던에서 부스만큼 고독을 느껴 본 사람이 또 있을까? 희망을 안고 누이 집을 찾은 부스는 몹시 놀랐다. 매부는 신앙을 저버린 지 오래고 날마다 술주정만 하는 절망적인 술꾼이었다. 사랑하는 누이마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매부는 부스의 신앙을 비웃고 집에서 내쫒아 버렸다. 장래 부스는 많은 나라의 무료 숙박소에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위안해 주어야 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무일푼으로 몇 백만의 시만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이 고생한 경험이 있어 후일 그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부스는 다시 전당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는 그 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무미건조한 생활도 지나고 전적으로 복음전도에 헌신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비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부스가 정식으로 목사가 되는데 넘을 수 없는 장애가 있는 것 같았으나 그는 고향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국내에서나 국외의 어느 곳이라도 보내주는 곳,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일하려고 합니다.” 그가 전도하는 곳마다 회중이 그의 타오르는 듯한 정신력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부스는 준수한 용모를 갖고 있었고 키가 크고 약간 굽은 등에 창백한 얼굴, 곱슬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눈은 접촉하지 않는 사람마다 그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라빗은 부스에게 전적으로 영적 사역에 헌신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부스 역시 바로 원하던 것이다. 진로를 택한 부스는 전당포를 떠나 오직 예수를 위해서 전도사 직을 선택하였다. 부스의 삶은 험난하고 어렵고 고독한 삶이였다. 하지만 부스는 이 삶에 안주해 있는 것이 아닌 비전을 바라보고 나갔다.

 

성역에 몸을 바친 남성에게 결혼문제는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구령자는 언제나 어둠의 권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일해야 한다. 때때로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만일 누구든 사역자가 그의 아내와 가정에로 돌이킬 수 있다면 그러면 밖에서도 평안함과 이해심도 생기고 격려도 하미 믿음으로 행하여 화목하게 된다. 또한 고상하고 거룩한 목적을 가진 영성 있는 사람이 된다면 이런 사람은 진실로 축복받은 사람이요 만사에 성공할 것이다. 부스가 캐서린 맴포드 양과 만났을 때 그는 이제 중대한 결정을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부스가 설교한 후 우연히 몇 차례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어머니로부터 세련된 영적 감화를 받고 자랐다. 캐서린은 어린 시설부터 예수를 사랑하여 마음을 바쳤다고 한다. 그녀는 확실한 구원을 알기 위해서 새벽 미명에 깨어 일어나 기도했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잠을 깨어 베개 밑에 두었던 찬송가를 꺼내어 찬송을 읽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의 위안하심이 어찌 그리 거룩하며 나의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찌 그리 큰 축복이 되는 지요” 그녀의 마음은 기뻐 춤추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도 물론 그녀를 받아 주셨으며 하나님은 그녀의 구세주가 되었다. 캐서린은 항상 척추를 앓고 있었으므로 학교에 오래 나가지 못했고 대게 병상에 누워서 지냈다. 또한 18세 때 결핵에 고생을 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허약한 병자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은 그녀에게 천국의 큰일을 맡기기 위해 준비 시키셨고 그래서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복종했다. 이러한 복종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녀의 정신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부스가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 두 사람 사이에 계속 사랑의 편지가 오갔다. 이제 두 젊은이는 자신들의 중대사인 결혼문제에 대하여 얼마동안 서로 기도시간을 갖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의 비밀을 쉽게 털어 내 놓음으로 일을 그르치는 상항에 대하여 마음 괴로워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자기 평생의 동반자가 될 캐서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였으며 그녀에게 편지로 자기의 사정을 자세히 말했으며 그는 그가 염려하는 것을 들을 숨김없이 기록하였다.

 

교파의 사정을 감안하여 부스에게 국내의 선교 사업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가 입학시험을 치리고 다음날 신학교에 입학하자 곧 칼빈주의 교리서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칼빈주의의 분명한 근거를 연구하여 리포트를 제출하라 지시를 받았으나 리포트를 준비하던 중 부스는 책을 30페이지쯤 읽다가 내팽개쳤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앞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을 차별하는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스는 개혁파와 일하면서 적지 않게 실망했다. 전국적으로 감리교에서 추방된 교인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교역자를 운하는 교회들이 많았다. 린컨쉐아의 스폴딩 교구에서 런던 본부에 목사 파견을 요청했을 때 부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때 부스는 곤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초청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처럼 고맙게 받아 들였다. 부스가 그곳에 순회 목사로 부임한 후 자기보다 훨씬 연장자인 목사들로부터 수준이 높은 설교를 들어왔다. 그는 노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스폴딩 사람들은 마치 하늘에서 온 천사처럼 환영해 주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나에게 주었으며 자기네들과 영원히 함께 지냈으며 좋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나에게 즉시 결혼하도록 권했고 집도 주고 말도 한 필 써서 그 지방을 순회 할 수 있게 편의를 보아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밖에 무엇이나 내가 원하는 것이면 다 해주겠다는 것이다. 18개월간 나는 그들과 내 생에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거기서 부스는 자기가 가장 기뻐하는 전도와 영혼구원에 푹 빠져 있었다. 그 기간은 가장 알찬시기였다. 부스에게 있어 캐서린은 폭풍우 속에서도 함부로 배를 밀려가지 않게 하는 닻이었다. 캐서린이 한번 침착하게 기도로 사물을 관찰한 후 결정한 일을 아무리 주위가 소란해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조용하고 강력하게 행동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구세군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마다 부스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 구세군 대장으로 그의 현저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결정하는 능력과 결정 후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다. 그의 표어 중 하나는 계획대로 밀고 가라는 것이다.

 

윌리엄 부스가 부흥운동을 시작한 다음 해에 영국 북서부와 남부지방에서 지냈다. 그는 많은 군중을 부흥회에 끌어드렸고 관심을 모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성공하였다. 지나간 해를 돌이켜 보면 당시 몇몇 도시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다. 윌리엄 부스가 경험해 본 결과 가장 악한 자를 찾아 복수 대신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일 부스는 휘하 사관들에게 영혼을 찾아가라, 가장 악한 자를 찾아가라는 구호까지 일러주게 되었다. 콘웰에서 부흥회가 있을 때 부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 때까지 그가 알아온 종교는 예의 바르고 점잖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쁨도 엄숙히 표현해야만 했다. 그는 예배에서의 기쁜 내색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혹시라도 누가 기뻐하는 내색을 하면 난색을 표했다. 북부지방의 노동자들이 모인 부흥회에서 부는 부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박수치자 이를 저지했다. 콘월의 부흥회에서는 회중들이 더욱 더 크나큰 기쁨을 만끽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스는 자기를 반성하고 부흥회의 참 정신에 방해되는 일이 무엇인 것과 자기가 택한 방법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는 종교란 전인적 이해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자기 마음의 기쁨의 표현은 오늘날 구세군에서 잘 하는 박수와 할렐루야이다. 한 교회 집사가 교회 잡지에 투고한 글에서는 부스는 특별한 인물이다. 내 생애에 6주간씩이나 부흥회에서 지낸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매일 저녁 집회가 흥미진진하였다. 그의 공박과 호소는 편견과 증오심에 가득한 불신자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데 성공했고 복음에 대한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교회 안에 자리를 더 만들고 자리를 더 만들고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 들어오게 했다. 성경공부 반에도 사람이 격증하여 새로운 반을 더 만들었다. 기도회에도 회중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도 그 교회 담임목사의 증오심에서 우러난 냉소와 반감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 외 다른 목사들은 부스를 그들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였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뻐하였으며 모든 평신도들도 그를 사랑했다.

 

윌리엄 부스 목사 내외는 복잡한 심정으로 자기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부스 내외는 서로 성격이 달랐지만 상호간의 약점을 서로 보충하고 사랑하며 살아왔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 부스 부인의 마음은 추호도 요동하지 않았고 결과가 어찌 되든 자신이 책임을 지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리교에서 분리하면 나는 고독감과 소외감에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남편이 그리는 그림은 어둡고 음침한 그늘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그와 맺은 언약을 지키렵니다. 나를 위해서는 집이나 형제, 누이, 부모 재산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저 나라에서 백배나 더 받으리라는 말씀을 기억됩니다. 보수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전도생활이 잘못 됐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빵과 치즈를 얻었다고 해서 잘못이 될까요? 거룩하신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희생하려 합니다. 남편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주며 사랑하고 잘 돌봐줍니다. 나는 남편에게 자주 말하지요 자기 의무를 수행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매우 훌륭한 것을 예비해 두셨을 지도 모릅니다.” 부스 내외는 전 세계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한 강력한 기구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택정하신 것이었다. 부스는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니며 은혜의 역사를 일으켰고 성령이 온 주민의 마음을 감동 시켰다. 이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술집들이 문을 닫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

 

하나님은 부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떠나 그가 전여 모르는 사람들 교회의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일반 시민을 찾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콘웰에 있던 부흥회에서 회심한 교인 가운데 부스에게 웨일즈의 항구인 카디프시에 와서 전도해 달라고 정해온 이가 있었다. 집회 장소는 큰 서커스장이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군사 부스가 장소에 대해 걱정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일이다. 환경에 그만큼 신경을 쓴 것은 전도의 좋은 성과를 위해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환경이 어떻든 그는 용감하고 전진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가상히 여기셨다. 부스 부인의 서신을 통해서 서커스장은 예상보다 좋았다. 결국 장소 문제도 구령을 위한 노력을 감퇴시킬 수 없었고 신령한 영이 장내의 사람들을 자극시켰다. 속세의 오락장소도 신령한 싸움터로 변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있을 부스의 승리를 다짐해 주었다.

 

윌리엄 부스의 호소로 모인 백 명의 회원들은 기독교 부흥협회를 조직하고 동부 런던 거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것이 얼마 후에 나타날 선교회의 전신이었다. 새 천막을 세워 줄 돈이 없어 일주일간 밤마다 거리에서 전도하고 일요일 낮 시간만 큰 카바레 홀을 빌려 회간으로 사용했다. 카바레 영업시간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여서 폐점한 후 청소하여 회관으로 사용했다. 새로 나타난 고마운 친구와 작별한 후 돌아오는 그의 마음에는 감사와 찬송이 넘쳐흘렀고, 더욱 하나님과 영혼을 위한 성전에 전력을 기울여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윌리엄 부스가 설립한 선교회의 명칭은 동부 런던 기독교 선교회라고 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에 소망을 두고 모든 것에 견디며, 절대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출생한 아기와 같았다. 동부 런던에 선교회를 세운지 3년 만에 센터가 12군데로 늘어났다. 그들은 거리, 극장, 회관, 점포, 작은방 어디서나 전도했다. 부스가 지휘하는 선교회가 점차로 국내 종교지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떤 이는 그를 열광주의자, 모험자, 제멋대로 하는 전도자, 광대놀음 잘하는 종교지도자로 말하고 있었다. 상류계급층에서는 대체로 이런 전도방식을 환영하지 않았으나 영적, 정신적으로 기갈을 느낀 남녀들은 기꺼이 호응했고 물질로 후원하고 때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가지 자신까지 희생 제물로 드렸다. 부스는 자기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런던의 가난하고 악한 시민들을 위해 산제물로 드렸다. 그는 아주 쇠약해졌다. 의사가 병석에 누운 그를 진단하고 다시는 무리하지 말라고 단언했다. 그 후 6개월간 그는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었지만 부스 부인이 계속하여 선교회를 지도했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위해 항상 부족함 없이 채워 주셨다.

 

윌리엄과 캐서린 부스는 여러 세기 동안 경건한 크리스천들이 개인적 혹은 공동으로 체험했던 깊은 깨달음, 환전한 사랑, 전체적 성화, 정결한 마음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들의 맏아들 브람웰을 성결이 지도자로 구별해 놓았다. 브람웰이 세속적인 유혹과 희망을 물리치고 인간의 영혼을 위하는 일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한때는 선교회에 큰 핍박이 닥쳐와 교역자들도 큰 시련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성결의 분명한 가르침에 분개하여 떠나버렸고 어떤 이들은 성결의 도리가 너무 엄격하여 슬슬 뒷구멍으로 내빼기도 했다. 그는 서신을 통해 "하나님 세계에 편만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불능하신 하나님 기이한 중에도 가장 기이하신 내 주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저 넒은 대양에 출렁거리는 파도 위를 마치 갈릴리의 산길을 걸어가듯 힘차게 걸읍시다. 폭풍우도 거센 파도도 걱정하지 마시오. 예수께서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1878년 기독교선교회는 제13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때는 벌써36명의 교역자를 가진 단체로 발전하여 초보적 실험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전도방식도 개인적으로 구전하던 것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많은 장소에 교역자를 파견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1878년 초기에 선교회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 방안을 왔다 갔다하며 브람웰과 레일톤 두 사람과 의논하고 있었다. 문득 질문이 나왔다 “기독교 선교회란 무엇인가?” 레일톤은 "개심한 근로자들의 지원병 군대”라고 썼다. 그 대신 구원이라고 쓰고 크게 읽었다. “기독교 선교회는 구원하는 군대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일제히 소리쳤다 "구세군!" 그들은 아주 위대한 생각을 했다. 이처럼 큰 발견을 하게 된 순간은 참으로 감격스럽고 장엄하였다. 1879년 초부터 급속히 발전했다. 선교회 기록 표에서 구세군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화이트채플 회관 강단 뒤에도 큰 글씨로 써서 붙었다. 선교회 잡지 이름을 구세군인으로 고치고 이 잡지를 통해 부스는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전 회원들에게 주입하고 구세군의 병사가 되어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출하는 신성한 목적을 전심으로 수행할 것을 호소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공의의 적에 대항에서 신앙의 필사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구세군 군기를 이처럼 대담하고 간단하게 고안한 것은 캐서린 부스이다. 이 영감은 겸손하고 세련된 부인의 강력한 정신적 감화에서 온 것이다. 군기는 삼색으로 되어 있다. 적색은 예수님의 구속하시는 보혈, 청색은 신자들이 가져야 할 성결의 생활, 노란색은 신성한 봉사의 힘을 주시는 성령의 불을 상징했다.

 

기독교 선교회가 구세군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눈부신 발전을 계속했다. 국내 각처에 활동하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책임자로 여러 젊은 여사관들이 임명되었는데 거의 두 무식했으나 하나님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충만한 분들이었다. 구세군의 성장에 크게 방해하는 곳은 술집들이었다. 전도 할 때 술을 교역자들에게 부어버리고 방해하였으며 가장 어려움은 양조업자들이었다. 경찰과 손을 잡고 사역자들을 감옥살이를 시키는 반면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전국의 구세군인들은 고통 받는 일에 익숙해져서 계속 공격을 가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미천한 사람을 찾아 하나님의 성도, 그리스도의 군병이 되게 하였다. 결국 영국 교회도 이처럼 악마를 정복하는 구세군 운동에 크게 탄복하고 캔터버리 대주교는 만약 구세군이 국교와 통합하면 천국을 위해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주교 일행과 부스 대장 사이에 중대한 회담이 있게 되었다. 이 때 이미 구세군이 국경을 넘어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많은 구세군인들을 각국에 파견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구세군은 특수한 선교사업을 위해 설립한 것이요 하나님 자신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전 세계에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구세군의 대장으로서 뒤로 물러설 부스가 아니었다.

 

사역을 하면서 계획적으로 선교사업을 위해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평생 그 지역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은 영국은 물론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파급되었으며 동부런던에서 설교를 들은 교인이 인도로 파견되며 구세군 사관을 파견시켜 달라 요구하는가 하면 일본, 아일렌드, 호주, 프랑스, 스웨덴, 미국 등에 구세군의 깃발을 꽃게 되었다.

 

구세군의 깃발은 교회에만 세워진 것이 아닌 부녀자들을 위한 사업, 노숙인 등의 복지사업에도 활성화 하였다. 부스는 캐서린 부스가 사망 후에도 자녀들과 동역자들과 함께 구세군을 이끌어 나갔으며 그 가운데 눈이 실명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 강단 위 한복판아 나가 많은 청중들에게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온 회중의 마음을 자극하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찾도록 간절히 권고하고 있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어둠에서 빛으로 악마에게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 대장이 가장 사랑하는 일이였다. 몸이 피곤했으나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창립자는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에서 돌아왔다.

 

윌리엄 부스는 회심한 후 68년간 이 약속을 지켜왔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순종하여 자기의 영혼만 지키고 승리하게 할 뿐 아니라 구세구노가 승리한 모든 영혼들을 돌보아주며 승리하도록 하여 믿는 자에게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다 이것은 단지 자기 하나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그는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부스 대장은 사경에서도 구세군기의 뒤를 따르는 자에게 피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만 여기에 필요한 것은 그의 언약을 믿고 그의 정신에서 살며 그가 진심으로 바라던 하나님의 경의를 보기 위해 전진하라는 것이다.

 

 

<서평>

나는 부스와 같이 친구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다른 친척들은 기독교이나, 우리집안은 불교 집안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고모와 한두 번 교회 간 것이 전부였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친구를 통해 구세군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구세군에 대한 매력에 빠지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많은 선배 사관님들을 통해 구세군의 열정을 보았고 구세군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 「윌리엄 부스」를 읽으면서 초대교회에 일하셨던 하나님께서 구세군을 통해서도 일해 오셨고, 지금도 함께 일하고 계신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스의 전기와 같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구세군의 사관학생인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구세군 사관으로서 헌신하는 것을 넘어, 부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영혼구령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나”라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확신한다. 사역함에 있어서 역경과 어려움이 두려워 포기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려 한다. 구세군 대장 윌리엄 부스처럼.

 

 

 

M.L.카펜터,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 (서울: 구세군출판부, 2006)

 

 

2010년 6월 강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