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
이제 나는(윌리엄 부스) 이와 같이 비참함 속으로 빠져드는 계층 사람들에게 바로 달려 갈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정성을 계속 집중하고 싶다. 완성하지 못한다면 심한 실망에 빠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이미 실시해온 여러 방법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할 것을 제창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방책이 중요하지 않거나 그 전에 이룬 것 이하의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돕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돕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건축가가 자기의 명성을 걸고 정밀하게 설계를 하고 집을 지으려고 할 때에 벽돌을 굽지 않는다면, 실패라고 단정되고 바보로 여겨질 것이다. 건축미의 완전함, 무제한의 자본의 지출, 그의 노동자들의 완벽한 신중함도 벽돌이 불에 굽지 않는 흙덩어리일 때는 소용이 없다. 그가 불을 지피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환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전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이들 희망이 없는 계층 사람들의 환경에도 그들의 몸가짐에도 어떠한 영속적인 효과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다. 거대한 아프리카 심림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한심한 삶의 일상을 묵상하는 동안에 그것은 우리 국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너무나도 생생한 그림처럼 여겨졌다. “최 암흑의 아프리카”가 존재하는 것 같이 “ 최 암흑의 영국” 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자체의 미개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문명은 그 자체의 피그미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자신의 문간에서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대성당과 궁전 근처에서, 스탠리 씨가 적도 바로 밑의 큰 삼림 속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던 것 같은 공포를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말할 때 과장하기 보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과장은 반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문제의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 규모를 거창하게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 “최 암흑의 영국”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 모든 계층의 남녀에 우선하여 그 실상에 우리가 “시급함”을 주장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 대답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 버림받은 자, 배척당한 자라고 주장한다. 내가 호소하는 “최암흑의 영국”이란 첫째, 자본 또는 수입이 없으며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한 달 안에 굶어 죽을 사람들, 둘째는, 열심히 벌어도 그 소득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극악한 범죄자들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법으로 정해 놓은 규정상의 급식비 수준에도 미달하는 사람이다. 최 암흑 영국은 크게 세 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원은 다른 원에 둘러 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외곽에 있으며 넓은 원에는 굶주리고 집 없는 자이지만 정직한 빈민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원에는 악한 일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원은 가장 안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중앙에 위치하는데 범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세 개의 원은 술로 흠뻑 젖어 있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그 어떤 제한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와 다음의 여러 항에서 내가 제시해 놓은 사업계획들이 도둑, 창녀, 술주정뱅이, 나태한 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없애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강림하신 것처럼 “현세적 구제의 새로운 소식” 즉 절박한 가난으로부터의 구제, 누더기 옷 및 비참함에서의 구제는 모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 복음을 거절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한 거절의 책임은 그들 자신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피리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알고 있다. 그리고 야게의 아들 아굴의 이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형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그대로 두면서 확실한 지반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되어가는 형편에 맡기라” 수요 공급의 법칙, 그 밖의 여러 구실로 그들의 양심을 달래 보려고 하지만 바다 위에서 실제로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 같은 구실을 적용하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되어가는 형편에 맡겼을 때 구명정에 탈 수 있을까? 경제학의 냉엄한 법칙이 과연 소용돌이치는 바다에 좌초한 선원을 구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가끔 그 조난에 대해 상당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회적 특수 요법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할 가능성에 관한 망상에 빠져 애를 쓰는 것이 아니다. 삶의 전쟁에 있어 가장 약한 자는 장벽에 부딪히게 될 것이며 실제로 매우 많은 약자가 있다. 그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은 물어뜯고 할퀴면서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힘겨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완화해 주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현재보다 경감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전투를 벌여할 대상은 바로 모든 형태 및 형식의 어리석음에 대해서이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필수적인 것들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때 아무 해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각이 없음을 어찌 우리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구세군 구제시설의 기록에는 그와 같은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그중 일부는 문자 그대로 입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비참한 사람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에 따른 어떤 행동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수많은 순진한 피해자들의 실존을 너무나 확고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가 이들 “물속에 잠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도하는 국가의 조직 또는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될 현존하는 기구로 어떤 것이 있는가? 나는 현재 존재하는 기구들과 그것들이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내가 강하게 인상을 받고 관찰한 바를 첨가하여 충분한 지면을 통해 설명하길 원한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최 암흑의 영국” 심상부에 빛을 비취도록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에, 크고도 끔찍한 해악에 대응하려고 하는 뜻은 좋지만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측면은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인간의 바지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금화나 은화를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배함으로써 새로운 하늘과 땅을 이루어 보겠다고 제창하는 사람들의 계획에 대하여 나는 여기에서 무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옳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십계명과 양립 하는 천년왕국으로 가는 지름길에 대한 반대론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모든 꿈과 포부에 나는 뜻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헨리조지의 “토지 가격 단일세”이던 에드워드 벨라미의 국가주의이든, 혹은 집산주의자들의 보다 정밀한 계획이든 그들 모두에 대한 나의 태도는 동일하다. 선량한 사람들이 하고 원했던 바를 나도 또한 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실용적인 사람으로서 오늘의 현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빈곤, 악습, 절망의 어둡고 참담한 정글은 우리가 지난 몇 세대와 몇 세기 동안 계승되어온 유산이다. 그 기간에 전쟁, 폭동과 내부적 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선조들이 물속에 침몰한 10분의 1 사람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도 없었다. 이제 우리는 과거 보다는 행복한 시대를 만났으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 형제의 보호자임을 인식하고 당파와 종파를 떠나 동포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세계를 좀 더 가정다운 것으로 만들도록 함께 일해보자 앞으로 추진되어야 할 모든 계획을 좌우할 첫 번째 요인으로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행위가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의 싸움에 있어 실패의 이유가 될 경우 그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 개인의 환경으로 인해 딱한 처지에 놓이고 또 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경우에는 그 환경을 변화시크는 것이 효과적인 구제책이다. 셋째 고려할 만한 어떤 구제책이라도 그것이 다루고자 하는 해악과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가져야 한다. 넷째 그 계획은 대단히 크게 세워야 할 뿐 아니라 영속적으로 한다. 다섯째 계획은 영속적임과 동시에 즉각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계획의 간접적인 특성이 우리가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일곱째 공동사회의 어떤 계층을 도와주는 반면 다른 계층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전계하려는 “계획”을 여러분에게 검토하여 줄 것을 간청 드릴 때 쓰일 조항들이다. 이제 재활을 위한 방법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즉 해외 공동체이다. 해외라고 말하는 것으로만 어떤 사람들은 그 계획을 저주할지 모르겠다. 본국에 있는 “불평하는 큰 떼”의 대열을 없애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시인하고 있는 사회 일각에 의해 이민 반대의 편견이 줄기차게 키워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행해온 대로의 이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큰 동정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비난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나는 강제적으로 어떤 영국인을 추방하기는커녕, 자발적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 남녀를 이주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삶의 발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오늘 그들을 조금만 도와주면 내일 그들을 구조해야할 필요를 예방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된 후에도 여전히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움을 주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지금까지는 이 계획이 거의 전적으로 다소 평판이 나쁘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지 모른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속해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항상 연구하고 있으며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업들이 나는 구세군에 의해 이것이 실현 가능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구세군은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는데 충분하리만큼 우세하며 또한 열의있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이 우리가 실현하기에는 벅찬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시도해 보고자 하는 희망을 가로막을 만큼 확연한 것은 아니다. 계획하는 그 자체가 현재로서는 다른 어떤 단체도 갖고 있는 않는 자격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계획을 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독점 영역이 되었을 것이다. 부유한 여러 교회는 이와 같이 명확하고 실제적인 형식의 실험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특권을 얻고자 다투어 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그 일을 할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우리는 최소한 우리 국민을 위해 이 큰일을 하려는 의지와 대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모험적인 사업을 위임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신임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신임장은 모든 물질적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우리가 믿는 바는 협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만일에 대비하고 있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서평>
최암흑기의 영국, 그리고 그 시대가 낳은 윌리엄 부스. 부스는 분명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와 백성들의 영적, 육적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 인물이었다. 부스는 40년간의 구세군 사역을 바탕으로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책이 아니다. 이것은 보고서이다. 현상(the darkest England)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이유를 밝혀내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출로(the way out)를 명확히 제시한 보고서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또한, 나로 하여금 ‘이 보고서는 마치 한 NGO가 기업을 상대로 낸 제안서의 형태와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었다. 부스는 암흑기를 탈출할 방법을 제시함에 있어, 여느 사상가와 같은 그저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지극히 실천가능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부스는 이 책을 통해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 하여 주었다.
‘사역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실제이다.’
그렇다. 사역은 실제이다. 어느 상조업체의 CF에서 ‘장례는 현실입니다.’라는 카피로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을 기억한다. 사역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다. 구세군의 사역은, 소외당한 자, 사회로부터, 친구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육적으로 심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을 도와, 저들이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적, 육적으로 거듭나는 것에 목적이 있다.
구세군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그저 밥만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밥을 줄뿐만 아니라, 스스로 밥을 지을 비용을 벌어들이게 하고, 그 밥을 지을 도구들을 구입하고, 집과 직장을 구하는 일, 그리고 그의 마음과 영혼이 평안함을 얻는 일, 이 모두를 돕는 역할이 구세군의 총체적 사역인 것이다.
Willam Booth 저, 구세군문학부 역, 「최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 (서울: 구세군출판부, 2009)
2010년 8월 강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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