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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서적 서평

성결에의 초대(The Call to Holiness)

by 초코우유 ∽ blog 2011. 4. 4.

「성결에의 초대」 The Call to Holiness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신자의 특전이며, “저들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없게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

 

성결의 교리는 하나님의 인간 구속목적의 근본 구성요소이다. 성화에서 시작하지 않은 의는 의라고 할 수 없다. 성결의 은혜는 인간적인 욕망이나 지도자의 희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으로 되는 것이다. 뜻이란, 첫째, 의지 혹은 목적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려 하신다. 둘째, ‘거룩’에는 힘 또는 능력의 뜻이 있다. ‘하려는 의사’는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가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다.

 

예수님의 성결은 완전히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의 목수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그가 먹고 마시는 일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성결이 나타났다. 성결은 20세기의 금욕주의가 아니다.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법칙 중의 하나는 성결의 체험이 예수의 모범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참된 것은 체험적으로도 참되어야 할 것이다. 성결은 추상명사이다. 사람들은 추상명사에 쉽게 동감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동감하고 결심한 바를 실제 행동에 옮기려 할 때 진리는 실제로 육신을 입게 되는 것이다.

 

분리주의자 바울이 어떻게 자기 인생중반에 ‘유대인과 헬라인’은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세상에 죄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거니와, 또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도 없다고 외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간단하다. 그는 예수만 바라보았고, 예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 그분만이 나태하고 영적으로 쇠퇴한 생활에서 우리를 일깨워준다.

 

‘거룩’이란 말은 본래 세속과 구별한 신성한 것을 지적하는 데 사용한 말이다. 그 단어의 뜻은 분리이다. 즉 거룩한 것은 보통 때 사용하지 않고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바쳐진 것을 말한다.

 

성결을 아주 간단하고 명백하게 단 한마디로 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화’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내재하는 그 곳에 또한 성령의 능력이 계신다. 성령이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화하게 하신다. 누구에게서나 그리스도화하는 기미가 보이면 이것은 반드시 성령의 운동하심에 의한 것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을 예수를 닮아가느냐 아니냐에서 그 흥망이 결정된다. 성경이 가르치고 구세군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결의 진리가 우리 생활체험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화의 문제는 외적 모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체험이란 최종적 자아포기요, 성령의 충만으로 모든 미덕을 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신 후 다시 하늘에 올라가 과연 내가 어떻게 행실을 갖나 내려다보고 감시하는 분이 아니라, 그가 내 안에서 일하시고 그의 성전(나 자신)을 정결케 하고 사용하시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뜻한다.

 

성결의 교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제일 목표는 유혹에서의 도피, 면제가 아니라 죄에 대한 승리이다. 승리는 죄의 면제가 아니다.

 

성도에게는 평안과 안정 대신에 심한 유혹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도 유혹을 받는다. 예수 자신도 시험을 받았다. 아버지의 뜻을 성취한다는 그의 마음에, 더욱 교묘하고 복잡한 시험, 악마의 미끼가 되기 쉬운 유혹을 받았다. 쿠츠는 어렸을 때 본 악마의 그림을 쉽게 잊어버릴 수 없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시던 그림 속의 악마는 천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악마는 그의 입술로 성결말씀을 인용했고, 예수의 귀한 사명을 성취하도록 여러 가지 좋은 방안을 일러주었고, 그의 제안은 가장 타당하게 보였다. 악마의 시험에 끝까지 대항해서 이긴 자만이 악마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성결의 체험이란 악마의 유혹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시험받을 때 자기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시험당할 때야말로 승리를 주시려는 좋은 기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결한 생활을 통한 우리의 목표는 시험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더 좋은 승리는 갖게 되는 것이다.

 

성결한 생활은 위기(crisis)의 생활이요, 동시에 과정(process)의 생활이기도 하다. 위기와 성장은 역설적인 것이 아니라 성결의 두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둘은 서로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상부상조해간다.

 

믿음으로 주의 성령을 받는 것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성결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특권으로 믿는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성결의 체험에서 가질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이 스스로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은 은혜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지속되어간다.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그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는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야 한다. 평안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대 스스로 뒤따라오는 것으로, 이 때 우리 자신을 평안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신약에서 완전이란 말은 자주 목적적인 말과 연관시켜 사용되었다. 즉 어떤 목적을 완수할 것을 가리켜 완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때는 그 사람이나 그 기관도 온전해진다. 교회로서 한 지체를 담당하고 있는 구세군도 자기 임무를 다하고 있을 때만이 완전하다. 구세군이 예수의 뜻에 합당한 바른 일등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예수의 제자로서 완전하다고도 할 수 있다. 각자가 자기 목적, 자기 처소를 지킬 것이며 구세군의 목적에 충성함으로 완전해질 것이다. 자신의 중심적 결정적 의지를 하나님의 손 안에 맡김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인도하고 조정하신다.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보다 더 풍성한 은혜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곧, 성서적 의미로 그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바칠 때 그 생명은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자기 앞의 예수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구세군 병사 서약문에 “믿는 자 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습니다.”라는 교리 고백의 구절이 있다. 성령의 다른 이름은 보혜사(comforter)이다. 보혜사란 단어는 위안을 주는 사람이나 사물이란 뜻으로 해석되며, 위안이란, 말의 뜻을 평안히 하는 것, 모든 고민에 견디기 쉽게 하는 것으로 마취제와 같다는 뜻이다. 구원은 곧 하나님의 행동, 구원자는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오,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도 제 할 일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자신의 뜻(의지)이 발동해야 한다. 일체의 악을 거부하고 내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는 정결하게 하시는 권세이시지, 우리가 연합해야 할 것이다. 성결의 축복은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우리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적 헌신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페니실린 주사의 효과와는 아주 다르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그를 받을 수도, 안받을 수도, 그와 친교나 동행을 환영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임재의 첫 표식은 사랑의 은혜이다. 그러나 사랑을 너무 감성적으로 취급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우리 생활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것보다 먼저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식의 행사도 냉정한 정신적인 동의도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그가 해를 받으시되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것이다.

 

사랑 없는 지식은 어느 시대에나 적그리스도였다. 적그리스도는 사랑이 풍성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적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반대한다. 적그리스도는 사랑으로 돌봐주지 않는다. 사랑 없는 말을 해서 상대방을 실망시키기도 잘한다. 때때로 종교적 모임에도 잘 나타나다가, 정작 목마른 사람이 한잔의 냉수를 간절히 바라는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강력한 불법자를 자리에서 내쫓으려면 더 강력한 자가 있어야 한다. 곧, 역사적 예수에게 나타난 성육신의 사랑, 곧 성령으로서 영원히 이 세상에 현존하신다. 적그리스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이 사랑의 은사는 신성하면서도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 다음에는 기쁨이 성령의 열매가 된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기독교적 체험에서 얻는 결실로서 이 체험은 어느 단계에서나 참된 것이다. 성령의 체험은 기쁨의 샘이요, 보고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요, 그의 나라와 그의 뜻에 관계된 것이다. 자신의 덕이나 실수 같은 것을 잊고, 어제 오늘 영원토록 계시고 풍성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특권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요, 나 자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권고하는 바울서신에서, 독자들이 주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요청하는 이유이다.

 

아무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 다만 죄만이 이 기쁨을 훔쳐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안다. 성결의 체험만이 기쁨의 열매를 탄생시키고 또 지켜준다는 것을. 세속적 쾌락은 오래 증기면 즐길수록 슬픔만 더해질 뿐, 이렇게 성령의 기쁨을 만들지 못한다.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요,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화평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세 번째이다. 추수해야 할 열매가 많아 한 가지씩 확인하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열매는 한 종류이며, 그 중 한 개만 맛을 보면 다른 열매의 맛도 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생활은 조화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성령의 평안과 거짓 평안을 분별해야 된다. 안일한 양심에서 오는 평안이 있다. 설교를 들은 후 내 심령은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마음의 근심도 덜기 시작했고,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며, 식사를 잘 마친 후에는 들은 설교도 있었고, 전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오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거짓 평안이다. 무관심에서 오는 평안도 있다. 남이야 빠져죽건 말건 상관할게 무어냐! 도피주의에서 오는 평안도 있다. 세상은 악하니 피해버려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평화의 미덕을 그 참여도에 두지 않고 다만 소극적으로 반평화적인 외적요소의 배제로만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라는 말을 환난 속에서도 할 수 있다. 세상의 환란과 그리스도의 평안이 공존할 수 있음은, 그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평안은 어떤 사건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평안이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니, 그와 친교를 가짐으로써 우리 마음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 믿음은 일어나지도 않을 쓸데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죽던 살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열매 중 인내와 자비는 수동적 소극적인 성질의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인내는 목적을 가진 참음으로, 자비는 그 목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기독교적 인내는 무력한 태도가 아니다. 목적을 가진 인내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며, 몇 세기가 지나도 요지부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안다. 그의 참으심에서 찾게 되는 것은, 그의 징벌이 아니라 대속하심이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해 따를 따라 참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자비로워야 한다. 이는 상호간에 인내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다양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려가지 성격과 기질을 가진 종이 필요한 것이니 서로 인내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만 옳다고 하지 마라. 예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곧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 자기 자신만 위하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신을 정죄하여 오히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희망을 두고 기대하시는데 누가 감히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그처럼 오래 참아주셨는데 나는 더 참지 못하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은 즉시 행동하는 것이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나서 일하는 사랑이요, 더러운 일도 꺼려하지 않고 나서는 것, 기쁘게 남을 돕는 손길, 준비하는 정신, 열심, 민첩한 발을 말한다. 선은 남의 어려운 일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한다. 성경에 선으로 번역되어있는 단어에는 유쾌하다, 동의하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구세군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일을 관대하게 평가해야 한다. 영문 내에 한 부서에서 일하는 이들은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칭찬해주어야 한다. 사관들도 일반 병사들을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 평신도 없는 교회가 없듯이 병사 없는 구세군이 있을 리가 없다. 많은 신실한 평신도들을 극구 칭찬해야 할 것이다. 자비석에 엎드린 남녀들을 가장 친절하게 집회에 안내해야 한다. 회개한 사람을 돌봐주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큰 영문에서는 사람도, 일할 부서도 많고 분주해서 그들을 놓치고 만다. 새로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범죄의 길에서 떠나려는 사람은 바로 그 범죄에서 떠나온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새로 개심한 사람만큼 좋은 친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사람도 없다.

 

충성(faith)이란, 신의, 신용, 좋은 믿음과 비슷한 말이다. 바울은 자주 이 말로 신뢰성을 나타낸다. 충성스러운 형제가 있기에 교역자는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은 가로전도에 꼭 참석한다. 진실한 교사는 혹시 자기가 한 일이 무시당하고 있지 않은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무도 자기를 반갑게 대해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교사에게 신뢰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착실하게 일하였는지를 알아주신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충성은 졸지 않았다. 충성한 사람 앞에는 곤란이 없어진다. 우리의 발이 그물에 걸리는 것은 의무를 하지 않거나 의무를 게을리 할 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은 뜻밖의 닥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들의 여론이 어떻든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를 찾으신다.

 

온유는 점잖은 것(gentle)이다. 헬라어로 온유는 원래 길들여진 동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이 제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사람이 시키는 대로 쓰게 된 것을 말한다.

 

절제란 자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절제는 하나님의 지배이다. 이 내재적 하나님의 지배는 내 인격에 합당치 않는 것 때문에 고민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진정 내 인격에 합당한 것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신다.

 

크리스천의 성결의 체험은 영적 최상목표인 그리스도화를 향하여 전인격적으로 재교육을 받는 것이며, 여기서 계속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다. 본래 인간은 위대한 자로 태어났으나, 그의 높은 지위에서 타락되고 말았다. 본래 선한 것이 악하게 된 것과, 본래 악한 것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만 나무라는 것은, 안이한 생각에서 하는 짓이며, 근본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이다. 죄는 본능에 잇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있는 것이다. 성결의 은혜는 성격을 아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를 조정하고 다시 지도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본래의 성격을 빼앗지 않으신다. 과오는 눈이나 성격,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결은 우리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를 바친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성결에 필요한 것은 의지이다. 이 인간의 의지야말로 모든 죄악의 근원도 되고 의로운 생활의 원천도 될 수 있다. 성결을 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바쳐야 할 것이다.

 

 

<서평>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거룩’이란, ‘성경을 옆에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무게를 잡으며 걷는 것, 거룩한 예배란 묵도로 시작하여 1장에서 80장까지의 찬송만을 부르며, 절대로 경망스러운 악기(예를 들면 드럼이나 키타같은)를 사용하면 안되는 것, 가능하면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는 것 등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거룩함을 그렇게 오해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룩, 곧 성결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제의 삶속에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구세군의 영성(Spirituality)은 행동하는 영성(Active Spirituality)이다. 어려움에 빠진 이를 돕고, 지나는 길에 떨어진 휴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잘못된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로잡는 것, 이론이 아닌 실천, 추상이 아닌 실제의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일거리들은 “하라(Do it!)”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주님이 시시각각 깨닫게 하시는 일들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결을 체험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얼마 전 일본지진피해 돕기를 위한 자선냄비 봉사를 한 적이 있다. 기간 중 (10)성령의 열매-사랑을 읽으며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것보다 먼저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로만 하여왔지, 나 스스로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추위와 불편한 복장(치마와 하이힐)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한 시간을 더 봉사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지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쁨이 찾아왔고,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결에의 초대에 응하는 순간이었다.

 

 

Fredrick Coutts, 「성결에의 초대(The call to holiness)」, (서울: 구세군대한본영문학부, 1998)

 

 

2011년 3월 강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