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세군 서적 서평

구세군인과 성례전(The Salvationist and The Sacraments)

by 초코우유 ∽ blog 2011. 5. 26.

「구세군인과 성례전」


인간은 자기들이 믿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대신하기 위해 인식이나 표식 또는 가시적인 물체를 갖기 원한다.


구세군에서 현재 택하고 있는 예배형식을 사용하게 된 것은 구세군에서 먼저 시작한 것은 아니다. 성례전 없이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구세군은 발견했다.


성례전은 초대 교회에서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례전의 중요성이란 예수께서 그것을 지키도록 명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있다.


예수께서 사망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면서 단순한 일 한 가지를 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빵 조각을 떼어주고 조그만 포도주잔을 주신 것이다. 교회의 생명과 예배를 위해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례와 성찬을 지키기 원하셨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에 있는 세례에 관한 구절,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있는 성만찬에 관한 구절뿐이다.


세례식은 사람이 새로운 생활 형태로 들어간 것을 나타내는 오랜 관습이었다. 예수 자신도 세례를 받을 것을 허락하셨다. 신약성경에 유아세례 받은 분명한 예는 없다.


최후만찬에 대한 기록 이외에는 이 성례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시초엔 제자들이 모여 간단한 음식을 서로 나누었다. 이 음식을 먹는 동안 또는 바로 식사 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떡을 떼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할 무렵 떡과 잔의 예식은 식사로부터 분리된 것 같이 보인다.


제일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와 떡과 잔을 나누는 얘기에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복음서는 사람들이 이 같은 일에 대해 특별나게 생각하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서가 시도하는 바는 예수자신의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배후에 있는 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딴 책들은 즉 디모데서·디도서 다른 사도의 서신들, 히브리서 그리고 묵시록에는 성례전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다. 새로 결심한 기독교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 밖에 필요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고 있으나 성례전만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도 성례전이 중요하고 또 잘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성례전이란 하등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례전의 사용이 어떻게 해서 초대 교회의 그처럼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초대 교회신자들이 여기에 관한 충분한 자료를 남긴 것이 없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예식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성찬식은 더욱 그렇다.


당시 교회에는 각종 예식과 이상한 행사들이 많이 있었다. 때론 불신자들의 예식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때 어린이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삼십 가지의 예식 전을 준비했었다. 어쨌든 15세기 트렌트교회 협의회에서는 교회 성례전을 일곱 개로 정하였다. 같은 무렵 영국 성공회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날 신교에 여러 가지 예식이 많이 있긴 하나 성례로서는 이상의 두 가지 만을 지키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례전을 지킨다. 구세군의 입장으로서는 신앙을 가지고 지키는 성례전이 은혜를 받을 수단이란 것을 부인해 본 적은 없다. 우리 입장에선 세례와 성찬이 허다한 사람들에게 참되고 영속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동시에 참된 교회의 일부가 되기 위해 성례전을 꼭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구세군은 세례식을 사용해서 크게 관심을 두는 바는 구세군인 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활의 새로움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는 이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구세군은 기독교인이 이상에 주장하는바 전부를 성례전 없어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성례전이 물론 하나님의 은사를 포함하지만 이 은사의 유일한 소유물은 아닌 것이다.


구약성서는 인간이 처음으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의 참된 하나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 가를 말해주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성례”란 말이 쓰이지 않았다. 대개 의식이나 표식은 시간이 감에 따라 그 본의를 잃게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해서 의식이 시작되면 종내는 그 의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뜻도 없게 된다. 의식이 그 참 뜻을 잃게 되는 이유는 첫째로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표식 없이는 그 표식이 상징하는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둘째는 만약 표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나의 정신은 집중되지 않았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새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관습 준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다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몇몇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관습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례의 행위가 아무런 영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이는 바울이었다. 그는 또한 이 의식을 교회의 일원이 되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부당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갈5:2-6, 빌3:3, 골2:11-15에 기록된 바울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대한 의의가 있다. 위의 성구 중에 “할례”란 말 대신 “세례”란 말을 넣는다면 바로 우리 세대에 필요한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그저 의식에 참가한 결과로 인해 그리스도안의 새 생활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당대 교인들에게 할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해야 했다. 침례가 아직껏 교회의 일원이 되는 가시적인 표식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래도 바울은 이 세례의식을 중요시 하는 위험성을 알아차리게 되었다.(고전 1:13~17).


교회가 교인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역시 유월절도 지키지 않게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할례를 받으라고 지시한 바가 없듯이 유월절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서에는 분명하게 유월절과 비슷한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들이 이제는 더 필요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성례전을 충실히 지키는 이들도 예식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례는 다만 “은혜의 방법”이요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받는 길이다.


신약시대 이후 교회 내에 흘러오고 있는 예언자적 전통은 첫째,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같이 교회의 관습을 지키는 동시에 사람들에겐 보이는 물체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물체를 바라보라는 경고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이나 물질적인 표식 없이도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구세군은 이 두 번째 예언자적 전통을 따른다.


조지폭스(George Fox)를 중심으로 하는 퀘이커(는 성찬식 없이 그리고 목사나 어떤 종류의 예식이나 예배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길 수가 있다고 믿었다.


구세군 초창기 얼마 동안은 영내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 창립자 자신도 유아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처음으로 성례전을 거부한 구세군인도 아니었다. 윌리엄 부스가 종교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교회와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의 관습을 잘 모른다고 해도 각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초대 구세군인 들은 차차 예배를 드리는데 의식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의식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조건도 아니며 또 복음에도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윌리엄 부스는 교회가 성만찬 문제를 가지고 격심한 논쟁을 벌려 교회에 큰 수치를 가져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윌리엄 부스는 신약성서에 제사직을 옹호한 구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에서는 제사직을 가진 사람들만이 성례전을 진행한다. 그리고 또 창립자는 교회 안에서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물세례 받지 않은 이도 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행11:15). 이 세례를 받은 이는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들인다.(롬6:3, 4, 갈3:27, 골2:12).


복음은 의식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여하튼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교회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증거하듯 구세군에서는 하나님의 명을 힘입어 독특한 입장을 증거하게 된 것이다. 성령의 힘을 입어 시작했던 만큼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1. 성례전은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참된 은혜를 받는 방법이었다.
2. 예배에는 예식이나 의식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으며 대부분 사람은 이를 필요로 한다.
3. 신약성서는 초대 교회가 장년 세례와 떡 떼는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4. 하나님은 성례전이나 딴 예식 없어도 인간을 만나기 즐겨 하신다.
5. 성례전을 사용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은 이를 사용하는 성실한 사람과 똑 같이 참된 교회의 일부를 이룬다.
6. 신약성서는 물세례 받고 덕과 포도잔을 받는 자만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7. 신약성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활은 예식이나 표식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8. 구세군은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이상의 진리를 증거한다.

 

<서평>


한국인의 저변에는 ‘다른 것(Difference)은 틀린 것(Wrong)’이라는 정서가 깔려있다.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독특한 국민정서... 그래서 ‘나와 다르면 틀리다’고 말하는 비성서적 문화 속에, 한국 기독교사에서도 조금만 이상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난무하였다. 어느 시기에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사람 혹은 단체가 시기가 지나 이단이 아니라고 평가되는 일도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재미있는 현실인 것이다.


‘구세군인과 성례전’은 구세군인들로 하여금 성례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가시적 성례전’을 행하지 않는 구세군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입장을, 외부인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현실적 목적도 담겨있다.


틀린 것을 다르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는 옳다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구세군은 성례전 - 세례와 성찬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님을 일찍이 깨닫고, 예배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나는 2003년 12월 대전의 어느 감리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 때 처음 경험한 성찬의 감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후 학부 신학생으로서 경험한 여러 번의 성찬식 때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세례와 성찬은 신앙생활에 유익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것은, 세례와 성찬은 구원에 필수조건은 아닌 은총의 수단이요, 신앙의 성장을 돕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William Metcalf, [구세군인과 성례전](The Salvationist and The Sacraments), (서울: 구세군대한본영, 1975)

 


2011년 5월 강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