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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서적 서평

한국 구세군사

by 초코우유 ∽ blog 2011. 4. 4.

「한국 구세군사」

 

 

구세군은 세계에 구원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군대식 조직으로 단결한 명칭이다. 국민을 노예의 경우에는 구원해서 자유를 주고 적국과 싸우려고 군대를 편성한다면 죄악의 노예된 인민을 해방해서 자유를 주고 인류의 대적되는 악마와 싸우려 유력 강견한 군대를 형성해서 만국민을 권유, 독촉하여 전부께 돌아오게 하는 종교다(윌리엄 부스)

 

동양에 구세군이 알려 지기는 1891년 일본 장로교의 거두 우에무라 마사히사가 영국에 가서 부스대장을 만났고 1891년 그의 잡지에 윌리엄 부스의 페인이용책으로 최 암흑의 영국과 그 해결책을 소개했다. 야마무로에게 큰 감화를 끼친 이시이쥬지는 1891년에 고아원은 동양구세군의 사관학교라고 일기에 썼다. 1895년 9월 4일 영국사관 14명이 일본에 개전했다. 구세군 만국역사에는 윌리엄 부스의 일본체재의 결과로 두가지 결과를 가져 왔는데 첫째는 동양부인들을 국내외에서 보호하는 단을 즉시 조직할 것, 둘째는 찰스듀스 정령보의 주관 하에 한국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부스의 한국개전 결심은 로드는 일본에 있는 한국 학생이 집회 참석하여 구원받고 한국개전을 청했다. 구세군의 절친한 후원자 윤치호는 1907년 일본서 개최된 세계 기독학생 대회에 참석, 영어로 연설을 해서 국내에 대인기였다. 실베스터는 한국에서 대표가 건너가 개전을 요청했다고 하나 위에서 말한 대로 중국에 의절대 관심에서 부스의 마음은 이미 한국이 깊이 간직되었을 것이다. 부스에 의해 파견된 레일톤 부장이 한국에 있을 때 지금의 아현영 뒤에 패쉬 및 페리양의 집에 기거하였는데 그들은 영국 부흥전도단 소속으로 전도와 함께 고아원도 경영했다가 나중에 그 시설을 구세군에 넘겼다. 오늘의 혜천원일대이다. 레일톤은 서울 평양 대구(황종률)둥지를 돌아보고 시베리아 철도를 경우 귀국하여 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들의 원만한 보고를 듣고 만국 본영에서는 한국개전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 배로 오다가 싱가포르에서 허가두 정령이 주일집회를 인도했다. 그들은 동경의 일본본영에 들러서 상의했다. 만국본영의 지시로 곤도참령이 미리 와서 1904년부터 한국 전도를 도모하든 일본조합교회 목사와 만나고 그들의 거처를 물색 중 서울 서대문 평동(지금의 고려병원 뒤편)에 자리잡게 했다. 허가두는 도착한 후 10월12일 주일 다른 대원들이 오기 전 자기 집 식당에 모여 적은 방에 70여명 사람들이 꽉 찼고 밖에서 엿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가두가 설교를 시작하자 데리고 온 통역은 몇마디 하고 입을 막혀버렸다. 허가두 부인은 할 일을 다 했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세상의 구주께 기도하자고 해서 열성으로 기도할 때 감동되어 6명의 개심자가 생겨냈다. 10월18일 허가두는 반우거와 함께 일본 통감부로 이또공을 예방 영국 주재 일본대사의 편지와 일본의 야마무로 참령이 이또공의 비서 후루와니 하사브나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전했다. 면답 요지는 구세군은 정치나 파당에 가입하지 않을 것과 영적 복리와 빈민들의 육적복지 증진에 힘쓸 것과 사회복지를 위해 쓸 건물과 금전적 보조를 요청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일은 두 사람이 미쓰이 경무총장을 예방, 구세군 전도와 사회개혁, 형무소 및 경찰서 전도의 발판을 만들었다. 10월 20일 저녁 처음 병사회에 78명, 미스터장이 열심히 통역했다. 25일 110명 26일은 불교인 6명이 방문하여 3명이 믿기로 했다. 27일 100명이 모여 30명 회개석, 11월 첫주 오후는 평동 본영 뒤에 테니스 코트에서 600명이 모여 30명 회개 따로 반우거 집에서 부인들이50명 모여 그날 모두 70명이 회개했다.

 

1909년 2월 5일 허가두는 서울에서 15마일 거리에 가서 길전도에 150명이 모였다. 16일 허가두는 송도에 갔고 이어 평양에 가서 한국사회회관에서 500명에게 전도해서 6인구도, 장대현 교회당에서 2천명 예배에 설교, 저녁선교사 모임에서 말씀 선포하였다. 4월 13일 다시 평양에 가서 강씨, 이씨, 심씨를 대동 수백 명의 교회 학생에게 여러 집회에서 말해 천 여명의 지원자가 나왔다. 1911년 4월 로드는 신의주로 픽스는 평양에 전도했고 허가두도 그곳에 갔으나 사업은 오래 게속되지 못했다. 충북 보은에서 11월 24일 본영에 와서 군가 100집을 사갔다. 반우거는 그곳에 군영을 설치코자 1909년 2월 9일 왕복 8일에 걸려 보은에 가서 읍내 향교 건물에 모여 12회 집회에 3인이 회개했다.

 

1912년 1월에 영국에서 나일러와 맨톤 두 사관이 나왔다. 대흥영 신축과 2월에 갈산에서 유구로 충청지방영 이전, 허일지방관이 유구, 갈산부흥회 637명, 진주의 4일 사경회에 1,148명회집, 허가두는 1월 7일 전라지방, 15일 송파, 2월 19~27일 충남을 순회 중 말을 타고 520리에 롸일리 정위도 수행해서 소년회를 인도했다. 4월 29일 서전사관 푸릭 부위가 서울에서 뇌병으로 승천함으로 5월 2일 양화진묘지에 안장된바 최초의 서양사관 승천이었다.

 

1916년 10월 10~17일간 개전 10주년 기념회를 보다. 내회국사관이 참석10일 학생 사관 악대를 선두로 행진 5분 내에 1천 여명이 초만원이 된중 활극도 했다. 주일은 4대로 나누어 보는데 부래지는 1영 이도식은 일본영 끼인은 2영에서 인도했다. 오후 연합대 가로전도 월요일 밤은 구세군의 밤 부래지부인은 가정단의 날을 인도, 금요일은 두 번 특별 성령회를 인도하고 토요일은 각기 귀임한 바 40명의 구도자가 나왔다. 1918년 12월부터 1932년7월25일까지의 기록한 후생학원약사를 보면 1918년 12월 30일 정자옥사장이 3,000원을 구세군에 기부, 서울 평동에 사관학교 외 한 칸에서 29명으로 시작 1919년 1월 2일 만국본영에 보고 4월 14일 상비금을 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허락 5월31일 부래지가 위원회를 조직, 8월16일 대장으로부터 육아사업에 중대성에 대한 각서 10월10일 걸아양육원에서 남자 실업관으로 이름변경 20년12월30일 첫 번 정부보조금 2,000원 받고 매월 400원씩 보조 받음. 21년 1월 14일 총독과 가옥문제 상의 6월 건물은3년 토지는 10년으로 빌렸고 10월 20일 참모총장이 악기 12개를 기증 22년 7월 도착, 22년 12월 북아현동 산18을 10년간 차용, 사용조건 세금 없이 국유지를 정부에서 대여 1926년 구세군 분규 사건의 진원지는 영덕 낙평이며 동기는 처우개선, 월급을 더 달라는 것이다. 대장내방직전 유구의 김덕준 부위가 두 이유로 면직 된 후 회개 치 않고 기인지방관을 괴롭힌 후 서울서 400원의 배상을 요구,(선교사들과 한국사관들의 차별)

 

1928.12. 한국 최초의 자선냄비를 시작, 15~31일간 20개소에서 848.67원 이 모금 이 후 1929년 본영에서 연중 행사표를 계획 추진하니 1월 화목과 성결, 2월 100주년 대전 3월 금주 4월 100주년 찬송, 극기 5월 극기 6월 군복 7월 100주년 감사 9월 소년구령 10월 구세신문 증가 11월 감사절 12월 배교자 회복으로 이는 이후 매년 실시하는 연중행사의 길표같이 되었다. 1월호 사관지에 지시를 내리고 박준섭 부인이 총재로 가정단을 조직 우울선의 도움으로 성경, 위생, 육아 가사등 공과를 마련, 매주 영문서 사용하게 하고 구세공보에 가정단이 신설되었다 세계 백만 구령대전이 한국에서 10월1일부터 시작 36년 말까지 1만명 구원을 목표로 포스터, 카드, 계획서, 병사의 서약서 등 작성, 시골, 서울 다나서고 지방전도대가 조직되었다. 36년 1,2호 사관잡지에 100만 구령대전에 대장의 소리로 개인적 방법, 개인적 연습, 개인적 종교, 불의 역사로서 부흥의 불을 전파한다. 등으로 작성되었다.

 

1월 21일 1천명에게 자선냄비 쌀 구제하였다. 2월 4일 황종률은 전주서 사관회 이어 원기리 덕천동 물우리를 순회 모두 62명이 회개, 한편 김상만 부관과 사관들이 인근영문에서 전도하였다.1940.10. 16~23일간 위일선은 사까모도와 함께 일본에 가서 한국 구세군 개편문제, 고문임명 등을 논의하였다. 1940년 10월 29일 황종률 정령보가 사령관에 사까모도라이지 참령이 총무서기관에 임명되고 위일선 참장은 자문위원으로 남았다. 그러나 10월 30일 황종률-사가모도명의료 총독부 학무국에 구세군 개편을 제한하였다.(한국구세군의 변혁-구세단)

 

1950년 로드 사령관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서 서울에 오니 옛 서대문 영에서 재경사관들이 모인 중 군복입은 이는 불과 5-6명 로드는 강제로 구세군이 되기를 권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했고 어떤 곤란이 있어도 자기는 구세군을 관철시켰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다. 황정령과 장운용 참령과 3인이 일심일체가 되어 일해 나갔다. 소위 2차 세계 대전을 치르기 이전 분위기로 돌아갔다. 좌충우돌로 내치 외교에 일할 의욕을 일으켰다. 나중에 호주에서 폭스사관을 불러서 그간의 재정장부를 정리 재정실태를 파악했다. 옛날 문서를 정리중 파기 된 것도 많았다.(개영50주년) 1958년은 50주년의 해 세계 가정단 총재의 예배 교육 친교 봉사로 하나님 나라 모형되는 홈건설에 공헌을 부탁하는 메시지와 50주년을 맞는 장운용 총무 서기관의 메시지로 감사 노고치하 민중신뢰 회년 축복을 말했다. 66년 6월 28일 장형일이 부령 승진 전라지방관피임 32명 전근이 있었다. 6월 16일 사관학생 하기 전장실습으로 대전1영 홍성, 안동, 마산, 복흥, 대구2영 영동병원에 9월말까지 파견 후 9월 15일 사관학교 2년제로 들어갔다. 미국 총 사령관 헵번 부장 동부인 10월7일~13일간 총회를 인도함. 구세군 주의의 확립으로 그는 그리스도인, 그가 하고 있는 미국 사업, 그의 구원성결전파를 들었다. 깊이 남을 구세군 정신을 새겨주었다. 9일 신문로 1가 58에서 신빌딩 기공식 인도, 신경산 사회 200명 군우와 함께 2천평(11층) 건축의 첫삽, 10월 18일 서울 후생학원 상암동 5천평 대지에 700평 건축(4천만원) 정지작업을 했고 천연동의 탁아소 및 영문 750만 착공 69.1월 완공, 68년 10월 15일 서울 170만원 보조 자체 300만원에 48평 미혼모 산실을 설비함(여자관) 이 역사책이 출판된 1975.10.8일은 한국개전 67년이 된다. 그간 우리 나라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일제 하의 조선으로 또한 대한 민국으로 3.4다른 체제하에 노였다. 그 안에 발족 성장한 구세군도 시대상의 강한 영향을 입었다. 사령관에 따라 활동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허가두의 개척시대는 모험 용기 정력근기의 활동으로 기초를 세운때요 부래지 시대는 3.1운동도 있은 때라 모세의 출애굽, 이사야의 성결 예수의 시험, 바울의 순교를 역설한 신앙부흥과 끊임없는 출진으로 확장시켰고 신태빈 시설 육아원을 시작했고 분산총회에서 외부인 인도등과 성경상 한국민에게 적응과 친밀감이 소외된 듯하나 실질적 발전이 있었다. 배일수 시절 사관학생 개선에 힘쓰고 재단설립 등 떠나기 아쉬운 점이 많았다. 아직도 우리는 약소교파라 한다. 남북한이 하나 되었을 때 보다 영문수는 많이 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질적으로 천양지 판이다. 사람은 가도 하나님은 그 사업을 계속하신다. 더구나 본국인 지도자 밑에서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서평>

이 책은 1975년 한국 구세군 개전 67주년을 맞아 발간된 책이다. 한국 구세군은 성실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달려온 나머지, 자료정리가 미흡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 구세군의 많은 사건들과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2010년, 지금의 한국 구세군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났다. 지난 2년 전, 한국 구세군 100주년을 맞이하여 또 한번 역사를 정리하는 귀한 책이 발간되었다. 바라기는 구세군의 발걸음이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며, 구세군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이 멈추지 않기를 소원해 본다.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서울, 구세군대한본영, 2004)

이전판 : 한국 구세군사, 장형일, 구세군대한본영, 461p, 1975.10.8. 발행

 

 

2010년 9월 강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