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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서적 서평

구세군 발전사

by 초코우유 ∽ blog 2011. 4. 4.

「구세군 발전사」

 

 


1865년 밸런스 가와 풀본 가 사이에 있는 퀘이커 교도들의 구장지에 세운 낡은 천막 속에서 윌리엄 부스를 통해 구세군의 최초의 주일 저녁 예배가 드려졌다. 새 천을 대고 꿰매면 찢어질 정도로 낡은 천막에서, 등받침도 없는 딱딱한 의자 위에 와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된 구세군의 예배. 화이트채플에서 시작된 구세군은 100주년을 맞아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단체가 되었고, 이제 세 번째 희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노팅험에서 자란 윌리엄 부스, 모진 풍파 속에 학교도 일찍 포기하며 13세에 몇실링의 주급을 받으며 전당포에서 일해야 했던 그가 런던 동부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는 주로 ‘바인’ 여인숙 또는 ‘블라인드베거’ 술집 앞에서 즐겨 전도하였다.

 

그는 노팅험에서 차티스트(1836-48, 영국 인민헌장의 운동자)의 대변자인 피거스 오코너를 만난 이후로 열렬한 감리교 개혁파(신파)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가 보아온 영국의 처참함은 40년 후 「최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에서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무도 돕지 않는 많은 빈민들에게서 심각한 자극을 받았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구세군 사회사업을 낳게 한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정 이때 받은 인상은 나의 전생애에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846년 노팅험에서 많은 20대 청년들이 참석한 복음전도집회에서 미국감리교 감독파의 제임스 코히(James Cauhey) 목사의 설교가 젊은 윌리엄 부스로 하여금 깊은 영적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윌리엄 부스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애쓰던 동부 런던은 돌밭에 비할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 땅을 옥토화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주무대인 동부 런던, 그리고 그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빈곤한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차근 차근 이루어져, 1870년 동부런던과 크로이든, 그리고 에딘버러에 13개의 큰 회관이 마련되었고, 이때 발간된 선교지는 “이제 우리는 타교회의 교구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하였으니, 돌밭같은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기독교선교회를 통해 점점 더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뻗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1878년 5월 캔터베리 대주교인 타이트의 말을 인용한 연회보고지 앞장에 기록된 말, “윌리엄 부스가 지휘하는 기독교 선교회는 자원군대(Volunteer Army)이다.” 구원(Salvation)을 위하여 자원한 군대 구세군(Salvation Army)은 1878년 기독교선교회 잡지 9월호 편집란에서 처음 그 공식명칭이 처음 사용됨으로 기독교선교회는 구세군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878년 선교회 회관으로 통하던 집회장소를 영문(corps)으로 개칭하고 전도사를 사관(officer)으로 부르게 되었다. 새로 군대형식으로 시작한 구세군의 발전은 빨랐다. 1879년 구세공보(The War Cry)가 발행이 되었고, 이는 군대의 전진 혹은 후퇴에 앞서 정보가 있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구세군 신문(구세공보)는 구세군의 발전 요인 중 하나이다. 구세공보는 구세군과 복음이 오늘날과 같이 널리 알려지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구세군이 세계로 퍼진 것은 지도자들의 결단력 때문만이 아니라 “성장한 단체의 에너지와 힘의 폭발”이었다.

 

1879년에 아모스 셜리는 필라델피아에 이주하여 한 의자제조공장을 세를 얻어 구원의 공장(Salvation Factory)이라는 간판을 걸고 미국에서의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집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서부 필라델피아에 영문 하나를 열고, 개심자들 중 한사람을 참위(Lieutenant)로 임명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이어 구세군은 미국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지로 뻗어나갔다.

 

여러 나라로 개척해나가는 “구세군의 발전사” 속에는 명예뿐 아니라 모욕도 많았다. 대륙 개척의 첫 열매였던 프랑스, 그 개척대의 인솔자는 부스 대장의 장녀인 캐더린이었다. 후에 캐더린의 자서전에 기록된 것처럼, 여자 사관학생들이 길에서 신문의 이름을 외칠 때 프랑스인 남자들은 상스러운 농담 또는 음탕한 말을 건네기도 하고, 때로는 여사관들에게 가까이 와서 함께 비밀히 만나자고 제의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 캐더린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만나자고 대답했고 남자가 민망해하며 도망쳤던 일화도 있다. 오베르깡쁘에서는 주민들의 증오심에 기인되어 공중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경찰에 의해 구세군회관을 폐쇄해야하는 일도 있었다. 캐더린과 베키트 정위가 마치 바울과 실라와 같이 복음증거사역 중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일도 있다.

 

1895년 9월 4일, 정령 에드워드 라이트 동부인이 동경의 YMCA강당에서의 주일집회로 일본에서 구세군을 처음 시작했다. 일본 구세군하면 의례히 기억되는 인물은 야마무로 군뻬이 사령관이다. 그는 일본에서 기독교에 무관심한 일반대중의 눈을 뜨게 하였고, 그의 저서「평민의 복음」은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책이다.

 

1908년 8월 로버트 허가드 정령 동부인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 도착했다. 회관이 세워지기도 전, 허가두 정령의 집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국인 구도자들이 나왔고 6주간이 못되어서 수백명이 병적에 등록되었다. 1910년 3월 서울에서 첫 회관건물의 정초식이 있었고, 그 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사관이 임명, 그 해 가을에 한국인 사관후보생이 훈련을 마쳤다.

 

창립자 윌리엄 부스와 그의 부인 캐더린이 세상을 떠나면 구세군도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 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관들의 충성과 병사들의 굳은 단결력으로 대변되는 구세군의 특성을 알지 못했다. 구세군인은 단순한 단체의 요원이 아닌 이름 그대로의 “병사”였다. 구세군은 제2대 대장 브람웰 부스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해나갔다. 그는 구세군의 주요한 행정관이었다. 그는 구세군의 운동을 잘 알고 있었으며, 많은 구세군인들을 잘 인도하던 지도자였다.

 

1414년, 브람웰 부스가 대장이 된지 2년이 채 못 되어 제1차 대전이 일어났다. 콘트레트 정위를 위주로하는 영국인 사관들은 영국 내의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집회를 하는 등, 구세군은 민족과 언어의 차별 없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즉시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자 7명의 남사관과 여사관이 프랑스 전선으로 왔고, 그들은 그 해 가을부터 도넛을 만들어 전방을 찾아 장병들에게 전하였으니, 이때부터 그들은 “도넛 걸” 혹은 “도넛 보이”로 통하게 되었다.

 

1919년 처참했던 제1차 대전이 끝나게 되었고,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는 제대군인들 가운데 구세군 사관을 지망하는 후보생의 수가 증가되었고, 따라서 각 영문을 지휘하는 사관도 증원되었다. 이에 청소년 사업은 보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되고, 청년병의 수가 장년병의 배가 되는 성장을 갖게 되었다.

 

1915년 불안한 러시아의 사회 정세 속에서도 구세군의 사역은 멈출 수 없었다. 그해 9월, 피난민들을 위한 호스텔 사업이 시작되었고, 1개월 후 이 수용시설에서 예배드리던 중, 돌연히 러시아 결찰이 침입하여 사관과 참여한 군우들을 체포한 후 심문하고 명단을 적어갔으며, 몇 주 후 각각 75 루불의 벌금을 3일 내에 납부하거나, 3주간 금고형을 받거나 택일하라는 명령을 받는 일도 있었다.

 

구세군의 조직 내에서 권위의 최상위에는 성서(Bible)가 있다. 그다음은 교리(Doctrine), 정관(Deed Poll=Constitution), 그리고 그 다음의 위치에는 최고회의(각 군국 지도자들의 모임)가 자리하고 있다.

 

구세군의 최고회의는 1929년 캐서린 브람웰 부스를 제치고 히긴스를 3대 대장으로 만든 회의이다. 이를 계기로 최고회의는 대장(General)의 권위보다 앞서있다.

 

제2차 대전이 진행 중인 1941년 5월 10, 11일 밤 영국 런던의 만국본영 사무소 건물은 완전히 파괴당했다. 이러한 큰 손실 속에서도 구세군의 지역사회 봉사는 그치지 않는다. 공습, 화재가 있을 때마다 방공대원들에게 식사를 공급하였다. 코크니에서 어떤 부인은 폭격이 있을 때마다 즉시 나타나는 구세군 여인들(Sally Ann)을 보고 “폭탄과 함께 내려왔느냐”고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진담에 가까웠다.

 

1939년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대부분 철수하던 무렵, 1996년에 취임한 사령관 토마스 윌슨 부장은 한국인 황종률 부령을 총무서기관으로 임명하고 후사를 부탁하고 한국을 떠나 북부 중국으로 취임했다. 윌슨 부장이 떠나게 되면서 한국은 만국본영과의 통신이 단절되었고, 해외로부터의 보조금이 끊기고, 계급 칭호들의 폐지, 군대식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명칭도 구세단으로 강제로 변경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결과 상당수의 사관이 떠났고, 영문에는 주인이 없고, 재산은 계속 팔아먹고, 어떤 재산은 징발당하였으며, 1944년 남아있던 사관들은 강제로 교회연합체에 가입되었다. 1947년, 사관과 영문의 수효는 전쟁 전의 3분의 1정도였고, “타나 남은 그루터기”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던 구세군인들은 허버트 로드 부장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다시 갈 길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남한은 후생학원의 소년악대원들도 전원 납치되고, 서울에 있던 로드 사령관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나 외교관 대표들과 함께 북한으로 끌려가 압록가엽ㄴ에서 추운 겨울을 세 번이나 겪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던 본영은 부산으로 옮겨지고 찰스 데이비슨 정령보는 만국본영을 대표하여 두 번이나 방문했다. 1953년 1월 크리스 위더슨(한국명 위도손) 정령이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본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63년 제8대 대장으로 프레드릭 쿠츠 부장이 만64세 2개월의 나이로 취임하게 되고, 1965년 구세군 창립 100주년 기념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1865년 런던의 블라인드베거 주점 앞에서 고고의 소리로 시작한지 100년이 지나, 구세군의 면모는 엄청나게 달라졌고, 10일간 계속된 이 기념 국제대회는 전세계의 갈채를 받았다.

 

세계 각국의 구세군 사업은 매우 중요하나, 중앙에 있는 대장의 행정력이 그 모두에 미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1981년 기준으로 일본은 일본인 부장, 한국은 한국인, 일도의 캘커타와 트리반드럼은 인도인 사령관,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서로 다른 출신의 서기장관들이 있다. 이것은 곧 구세군의 다민족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래도 구세군은 구세군이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화해의 사역은 곧 궁핍한 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역이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못할 때 교회의 사역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서평>

 

구세군의 발전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은 1981년에 번역된 책이다. 21세기가 10년이나 지난 지금 돌아보면, 구세군은 지난 130여년의 시간동안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대(world) 속에는 구세군이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무수히 많이 남아있다.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는 싸우리라”(I'll fight!)고 하였던 창립자 부스 대장, 구세군 정신의 뿌리이자 중심에 있는 그의 구세군 창립의 목적과 그 본질은 여전히 살아있다. 한국의 많은 구세군의 사관들, 그리고 그들의 지휘아래 있는 구세군인들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온 “구세군이라 안된다”는 식의 패배감, 그리고 “구세군의 많은 규정들이 오히려 구세군의 발전을 더디게 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는 구세군인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구세군이 군대식 조직 형태의 시스템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은 “상명하복”의 충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대, 진짜 군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가 있었기에 창립자의 정신, 곧 구세군 정신이, 그 정신 “본질”이 덜 희석되고 덜 변질되고 살아남아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많은 (사관을 포함한) 구세군인들에게 있어 구세군의 형식과 제도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일정부분 제한받게 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시간과 물질, 재능,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누군가에게 구속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구속된 존재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것이요, 그리하여 감당키 힘든 커다란 선물을 받은 존재이다.

 

많은 어려운 점이 구세군의 제도 안에 있음을 구세군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느 단체가, 아니 개인일지라도 문제없이 완전한 존재가 어디 있으랴! 불완전한 인간 하나하나도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일진대, 구세군이라는 단체가 어찌 완전함으로만 쓰임받을 수 있으랴.

 

복음의 생명력과 본질을 찾아 탄생한 영국 감리교회가 100년을 넘게 되었을 때 그 곳은 가진 자의 교회가 되었고, 윌리엄 부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 곳을 뛰쳐나와 소외된 자들에게로 나아가 희망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예배의 처소를 제공하고 자비석을 베풀었다.

 

2008년 10월을 기점으로 한국 구세군은 100년을 맞이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마지막 희망을 구세군에 걸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회(church), 아니 영문(corps)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영문에는 과연 이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이들이 자유롭게 예배하러 찾아올 수 있도록 문이 활짝 열려있는가. 노숙자가 교회로 찾아오면, 그들이 일반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 예배할 수 있는 영문이 얼마나 될까. 예수님이, 아니 윌리엄 부스가 여기에 찾아온다면, 우리에게「최암흑의 구세군과 그 출로」(In Darkest Corps of the Salvation Army And The Way Out)를 선물하지는 않을까.

 

 

 


Fredrerick Coutts 저, 권성오 역, 「구세군 발전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2010년 5월 강봉구